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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범도는 1908년 3월 20일 부인 단양 이씨가 일진회 간부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고, 6월 16일 장남 홍양순이 전사하는 등 가족을 잃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홍범도를 괴롭힌 것은 탄환의 부 족이었다. 반년 이상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 며 탄환은 계속 떨어져 갔고, 노획한 무기로 보충하 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탄환 부족으로 전투 능력을 상실한 홍범도는 의병부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으며, 1908년 11월경 부하 2명 및 차남 홍용환 (洪龍煥)과 함께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들어갔다. 홍범도와 최병준의 만남, 그리고 대한제국 최후의 국내진공작전 (1910) 홍범도는 연해주 여러 지방을 거쳐 추풍(秋風) 지 역의 코르사코프카(Korsakovka)로 들어간 후 독립 자금을 모금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1910년 4월~5월경 의병 동지 30여 명과 함께 무장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무산, 갑 산, 종성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것은 연 해주 의병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마지막으로 감행 한 국내진공작전이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의 반격 으로 인해, 동행한 의병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혼자 살아남은 홍범도는 북간도로 탈출했다가 블라디보 스토크(Vladivostok)로 돌아왔다. 그런데 홍범도가 연해주 의병을 조직하여 국내진 공전을 준비하고 있던 1909년 하반기에서 1910년 초 사이에 홍범도를 찾아간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병준이다. 최병준은 함경북도 온성(穩城)군 태생으로서 대한제국의 관직인 중추원 의관(議官)에 임명된 적이 있는 양반 출신이다(이 때문에 본명 대 신 최의관[崔議官]으로도 불렸다). 러일전쟁 당시 북 변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조직 한 충의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연해 주 연추(煙秋)로 망명했다. 1908년 4월 연추 마을 최 재형(崔在亨, 1860~1920)의 집에서 동의회(同義會) 1911년 11월 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형제 엄인섭과 함께 기념 촬영한 홍범도(오른쪽, 독립기념관 제공).  홍범도와 최병준의 주요 활동 지역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