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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대종회보 40호· 23 충의공엄흥도충신기념관 복원과 충의공기념공원 조성을 위한 고유제문 억조창생 모든 천지신명 신령님들이시어! 충의공엄흥도충신기념관은 우리나라 역사상 충효사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선조 초기의 영월 호장(곻越戶長) 엄흥도(嚴興道) 충신의 의행(毅궋)을 재조명하여 우리 국민과 모든 후손들에게 충 (忠), 효(孝)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충의공엄흥도충신기념관에는 우리나라 화폐 5천원권과 5만원권에 이율곡과 신사임당을 그린 이 종상 화백의 작품인 충의공 영정과 단종의 유배과정 및 충의공 의행도 등 14폭의 그림이 전시되어, 영월을 찾는 관광객들과 동양화 및 인물화를 전공하고 있는 청년 대학생들의 필수 학습 관람코스가 되어 왔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이제는 관람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선조의 큰 비극의 하나인 단종 폐위사건으로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降等)되어 1456년 6월 28일 16세에 이곳 영월로 유배(괥配) 된 뒤 그 이듬해인 1457년 10월 24일 마침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엄호장은 노산군의 유배 중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노산군을 찾아가 그의 상심(傷心)을 위로하였고, 사후에는 시신이 동강(東江)에 버려져 있을 때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즉, “옳은 일을 위해서는 비록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선한 일을 행하겠노라”라며 세조의 삼족형(三 族刑)의 명(命)에도 불구하고 의연(毅然)히 일어나 세 아드님과 함께 시신을 거두어 공(公)의 선산 (先山)인 동을지(冬乙旨)에 염장(곲葬)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노산묘이며, 오늘의 장릉(莊겓)입 니다. 엄호장은 염장을 마친 후 가족들을 멀리 다른 지방으로 피신케 하고 자신은 옥체(玉體)에서 거둔 어포(御袍)를 수습하여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로 가서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초혼제 (招魂祭)를 드려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빌었습니다. 우리민족 억조창생을 지켜 오신 천지신명 신령님들이시어! 공의 자손들은 그로부터 242년 뒤인 1699년(肅宗 25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겖位)되어 노산묘가 장릉으로 추봉(追封)되기까지 삼족형을 피하여 광명천지(光明天地)를 등지고 각지로 흩 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한편 공의 후손들은 이 기쁨도 잠시, 노산묘가 왕릉으로 추봉됨에 따라 둘레 5리나 되는 선조의 선 산(先山)이 나라 땅으로 귀속하게 되어 우리 엄문의 관향인 이곳 영월의 선산에 안장되어 있었던 시 조님으로부터 10대조까지의 묘를 잃게 되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엄호장의 충절(忠節)은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을 위한 것이어서 아무런 대가도 바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무서운 형벌을 무릅쓴 것이었으니 실로 만고에 빛나는 절세(絶世)의 충절(忠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