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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결행된 도쿄 2 · 8학생독립운동 33 책임을 맡아 관련 준비를 진행해놓았다. 독립선언서 작성은 처음에 김동인에게 의뢰되었 지만, 그가 사양했으므로 이광수가 맡았다. 독립선 언서는 편지글 1매,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선언서, 결의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글은 무엇인가? 일 본 의회 등으로 발송할 때 내용물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이광수는 1919년 1월 중순에 그 의 하숙집인 요츠야구[四谷區] 가타마치[片町]에 있 는 명계장(明溪莊)에서 3일 밤낮을 들여 이 글을 작 성했다. 그러나 그 글의 방향은 백관수 등과 협의하 여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작성한 글은 이광수가 직접 영문으로 번역하고 은사이기도 한 메이지학원 랜디스 박사의 감수까지 받았다. 처음부터 국제사회 에 공표할 것을 의식하고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 선언서 등은 1919년 2월 8일 오전에 도쿄 주재 각국 외교공관 및 일본의 의회, 조 선총독부, 신문 및 잡지사, 지식인 등에게 발송되었 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신문사에 관련 보도를 하지 말 것을 지시하여 이 선언서 내용은 전혀 일본 신문 에는 보도되지 못했다. 선언서의 내용은 ‘일제의 한국 식민화는 한국인의 뜻이 아니라는 점, 그 증거로 일제 지배 10년 동안 한국인은 계속 독립운동을 벌여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일제 10년 통치를 분석하여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 이전에 한국을 위협했던 러시 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더 이상 한국을 위협할 일 이 없으니 한국이 위란에 처할 국제적인 조건은 제 거되었다는 점, 한국 국민은 모두 독립을 염원한다 는 점을 선언하고 민족대회를 소집하여 한국인의 운 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것,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를 한국에도 적용시키라는 내용이었 다. 국제사회에 한국 국민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한 국이 왜 독립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한 것. 이것은 대한제국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 주체로 자신을 자각한 민주시민의 소양을 그대로 드 러낸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새롭게 수립된 정 당내각의 수반으로 민주주의 소양을 갖춘 인물로 판 단한 하라 다카시[原敬]를 향한 호소였다. 그러나 그 들의 각오는 결의문 맨 말미에 명시했듯이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일본을 향해 영원한 전 쟁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919년 2월 8일, 이날은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더 니 오후가 되어 폭설로 변했다. 신문은 36년 만의 대 설이라고 보도했다. 오후 2시부터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백관 수가 독립선언문,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는 궐 기대회가 진행되었다. 집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 고 도쿄 경시청 이코마[生駒] 과장과 니시간다[西神 田] 경찰서 나카타니(中谷) 서장 이하의 정·사복 경찰 이 출동하여 경계를 펴고 있었다. 김도연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할 때 일본 경찰은 행사 진행을 중지 시켰으나, 학생들은 거부하여 양측에 난투극이 벌어 졌다. 회관의 유리문은 부서졌으며 주동 학생들은 부상을 입고 연행되었다. 『지지신보[時事新報]』 기자 는 이날의 소동을 1919년 2월 9일자 신문에 게재했 다. 그 글에는 “우리는 어떠한 압박을 받더라도 최후 의 1인이 될 때까지 목적을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끌려간 자는 주의(主義)를 위해 그렇게 된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