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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10년 전후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방략과 임시정부 수립운동 33 위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우리 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 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는 신민회의 발원(發願)하는 바며 신민회의 회포 (懷抱)하는 까닭(所以)이니 약언(略言)하면 오직 신 정신을 깨우쳐(喚醒)하여 신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 (新國)을 건설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민(新民)과 신국(新國)은 무엇일 까? 신민은 근대 국가에 걸맞는 ‘국민’이요, 신국은 자유문명국, 즉 ‘공화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 한 목적은 먼저 국권을 회복해야만 가능한 것이 었다. 이를 위해 ‘통일연합론’이라는 전략을 수립 하였다. 통일연합론은 국내를 비롯한 해외 각지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연합기관을 설치한 후 이를 하나로 통일한 뒤, 국권 회복후 새로운 국가 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1907년 1월 초순, 공립협회는 국내에 신민회를 조직하기 위해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파견하였 다. 이어 신민회 창립을 지원하기 위해 중견 간부 들도 잇달아 국내로 파견하였다. 국내 뿐 아니라 러시아 등 해외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도 중견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공립협회에서 국내외 각지에 통일연합기관 설 치에 주력할 즈음, 1907년 일제는 만국평화회의 를 빌미로 고종[광무제(光武帝)]을 강제 퇴위시키 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 서는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정미(丁未)의병 전쟁’, 또는 후기의병전쟁이라 일컫는다. 이때 공립 협회는 “형식상으로 아직 국호있는 것을 믿지 말며...폐일 언(蔽一言)하고 소위 교육이니 실업이니 실력이니 일절 정지하고 독립전을 시작할지어다.” 라고 선언하였다. 정미의병전쟁을 ‘독립전쟁’이라 고 명명하고 즉각적인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주창 한 것이다. 그러나 1908년 의병전쟁이 쇠퇴하자, 공 립협회는 미·일전쟁 등 최적기를 포착하여 독립전 1909년 국민회 창립(클래어몬트) 기념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신한국’건설을 주장하는 논설을 게재한 신한민보 기사(1910년 9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