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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1 · 3학생독립운동의 전개와 의의 33 다. 서울의 학생 시위를 계기로 동조활동 은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개성, 인천을 비롯하여 평양, 원산, 함흥, 경성 (鏡城), 춘천 등 경의선, 경원선 철도 연변 의 대도시에서 학생들이 시위나 동맹휴학 으로 항쟁했다. 한편 신간회 본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학 생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이를 민중 시위 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신간회 내의 민족주의 계열 인 사들이 중심이 된 이 계획은 일제 경찰의 사전 검거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러나 신간회 본부 차원에서의 시 위운동 계획은 이후 학생운동의 전국화 과정에서 신간회 지회 회원의 활발한 참 여를 이끌어내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1930년 1월초 3학기 개학과 더불어 광 주학생에 호응한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실 업보습학교, 각종학교, 보통학교 등 각급 학교에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지역도 주요도시 뿐 아니라 전국의 시ㆍ군으로 빠르게 확산 되어갔다. 학생들은 ‘광주학생 석방만세’와 더불어 ‘대한독립 만세’, ‘피압박민족 해방만세’,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처음 사소 한 충돌에서 출발한 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서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광주에서 한일학생의 충돌 자체가 민족적 충돌이 었을 뿐 아니라 한인 학생만을 편파적으로 구속한 일제의 행위도 민족적 차별대우이니 민족적 충 돌을 의미했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은 한인 학생 모두가 받는 것으로써 식민지 민족의 문제였다. 이것이 학 생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결국 시위 전국 화의 가장 큰 원인은 민족차별,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런데 식민지 노예교육의 타파는 궁극적으로 식 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는 것 이었다. 따라서 운동이 진행되면서 ‘노예교육 타파’ 일제강점기 광주고등보통학교 전경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 보도기사(중외일보 1929.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