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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독립운동 방략의 변화 33 석주 이상룡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양 학문을 접하 고 ‘백성(民)’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후 그의 공부는 유학에서 서학으로, 그리고 그것을 나눌 대상도 선비에 서 백성(民)으로 옮겨 갔다. 그는 서 구 사상에서 국가를 만인의 약속, 즉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는 사회계약론 을 수용하였다. 이처럼 서구 근대 사 상을 수용한 이상룡은 많은 사람이 모여 만든 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대 한협회와 협동학교 관련 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상룡은 평생을 독립운동 에 헌신한 애국자로서, 위정척사 사 상에서 애국계몽운동과 무장투쟁, 그 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 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생애는 우리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기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업적 은 오늘날에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 승하는 데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석주 이상룡의 가계와 공부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1858년 11월 24일 경상도 안동군 법 흥동 임청각(臨淸閣)에서 고성 이씨 가문의 종손 이승목(李承穆)의 3남 3 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상희(象羲)였고, 자는 만초 (萬初), 호는 석주(石洲)였다. 그는 안동의 유력한 문중 가운데 하나인 고 성 이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혼반과 사승(師承)관계로 지 역의 많은 명사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들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의 조부 이종태(李鍾泰)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진화(金鎭華)의 딸 을 배필로 맞았다. 김진화의 아들 김흥락(金興洛)은 이종태의 처남이 되 었고, 이상룡의 진외종조(陳外從祖)가 되었다. 이종태의 누이가 척암(拓 庵) 김도화(金道和)에게 시집을 가면서 김도화는 이승목에게 매부가 되 었고, 이상룡에게는 존고모부가 되었다. 아버지 승목은 안동 권씨 벌 ( 橃 )의 후손인 진하(鎭夏)의 딸에게 장가갔다. 을미의병장 권세연(權世 淵)은 이상룡의 외숙부였다. 이런 까닭에 당시 퇴계학맥의 중추를 이루 었던 정재학파(定齋學派)의 거유(巨儒)들이 임청각을 자주 드나들었고, 이상룡은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상룡의 학문과 사상 형성 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그의 스승 김흥락이었다. 위정척사파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 퇴계 학맥을 계승하여 척사론적인 관점을 고수하였던 이상룡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하였 다. 당시 의병장은 석주의 외숙부인 권세연과 스승 김흥락, 김도화 등이 1896년 경북 안동에서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세연(1836~1899)이 작성한 격문(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