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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평안도, 3 · 1운동을 이끌다 33 관련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다. 경성(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가 독립선언 식을 거행하고 그 직후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 서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 주지의 사실이 기 때문이다. 그런데 3월 1일의 상황을 보면,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운동은 다소 예외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실제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대부 분의 지역이 오늘날의 한강 이북, 즉 북한지역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운동이 발생한 곳이 바로 평 안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3 · 1운동’이란 명 칭에 걸맞게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서울· 고양·해주·원산·평양·안주·진남포·의주·신의주·선천 등 열 곳에 불과했는데, 이중 서울과 고양이 사실상 같은 생활권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를 제외한 모두가 한강 이북이었고, 여기서 황해도 해주와 함경남도 원 산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곳이 모두 평안도지역이었 다. 즉, 이는 사실상 3 · 1운동의 시작을 연 곳이 평안 도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말해준다. 3월 1일 발생한 평양·의주·선천지역의 3 · 1운동은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이들 지역의 3 · 1운동은 민 족대표였던 길선주(평양), 유여대(의주), 양전백(선 천)이 2월부터 시위를 준비한 가운데 촉발된 것으로 애초부터 계획된 만세운동이었다. 그리고 이중에서 도 특히 평양은 만세운동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오히 려 서울보다도 더 먼저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 다. 서울 파고다공원 시위의 경우, 태화관의 민족대 표들과는 별개로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과 정에서 오후 2시 이후 운동을 촉발시켰는데, 평양의 경우는 오후 1시부터 남산현교회에 집결하여 광무 황제(고종) 추도식을 거행한 뒤 만세운동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평안도지역의 3 · 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빨리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지 닌다. 사실 3 · 1운동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가 3월 말에서 4월 초였다. 우리 가 3 · 1운동과 관련하여 꼽는 대표적 인물인 유관순 (柳寬順)의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 시위 역시 3 · 1운동 시작 한 달 뒤인 4월 1일에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같은 사실이 좀 더 와닿는 것이다. 그런데 평 안도는 달랐다. 평양·의주·선천 등 주요 도시에서 3 월 1일 시위가 발생하였고, 직후 3월 10일까지 열흘 간 평안도지역에서만 150건 이상의 만세운동이 일 어났는데, 이는 평안도지역 3 · 1운동의 전체 시위 건 수의 절반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즉 평안도지역의 3 · 1운동은 그 어느 지역보다 빨리 일어나 그 어느 지 역보다도 빨리 확산된 것이다. 일제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있 다. 그것은 평안도지역의 3 · 1운동이 단순히 빨리 일 어나서 빨리 확산된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다. 즉 평안도지역의 3 · 1운동이 그 어떤 지역보다도 맹렬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굳세고 용맹 한 평안도인의 기질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가미된 결과였다. 여러 관련 사례가 확인되는데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3월 4일 평안남도 강 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만세운동을 들 수 있 다. 이날 시위는 이웃한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