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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배경과 전개 과정 33 에 관한 일체 미진 사건은 본 회의 의사 순서 중 노동 문제가 종료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함”이라는 제 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비공식회의의 결과 나온 일 시적인 타협안이었다. 대표회의 전체 의정 가운데  시국문제에서 임시정부 개조안을 둘러싼 쟁점을 미 루어두고 독립운동대방침(군사, 재정, 외교), 생계문 제, 교육문제, 노동문제를 처리한 후, 국호 및 연호,  헌법, 과거문제, 기관조직, 신사건, 선포 등의 예민한  문제를 다루자는 취지였다.  4월 16일 회의가 재개되어 각분과와 위원회의 보 고가 계속되었고 이후 5월 10일까지 각 분과에서 제 출된 안을 통과시켰다. 5월 11일 의정 가운데 독립 운동대방침 이하 각 분과 의안이 종료됨을 선포하 고 시국문제를 다시 토론할 것을 선포하였다. 제안 된 안은 모두 4개로 윤자영 등의 임시정부 개조안(3 월 9일), 김우희 등의 신기관 건설안(3월 13일), 박건 병 등의 국시 확립안(3월 13일), 여운형 등의 신독립 당 조직안(4월 11일)이었다.[( )는 제의안의 제출일] 개조파 대표들의 탈퇴와 대표회의의 파열 5월 12일 개조파 31명의 대표들이 출석하지 않고  제출한 휴회 청원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정인교가 긴급제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시국문제는 이미 결정한 양안(윤자영 등이 제안하여  수정 · 통과된 제1항, 제2항)으로 종결하고 기타 제안  중 제안자 또는 찬성자로부터 취소한 것 이외의 모 든 제안을 일절 기각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창조파가 윤자영 등의 임정개조안 폐기를 목적으로  한 기습적인 제안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우희의  신기관 건설안은 동의자 오창환이, 여운형 등의 신 독립당 조직안은 여인빈이 취소하였다. 5월 15일 부의장 안창호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비 서가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헌법기초위원 이 진산 등 사면청원서와 소속단체인 서로군정서 및 한 족회의 대표소환 통고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차점자 를 승임하기로 결정하고 의장에 윤해, 부의장에 신 숙, 비서장에 오창환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창조파  대표들이 대표회의 간부진을 전면 장악하게 되었다.  의장 김동삼 등 서간도 대표들의 대회 탈퇴는 대표 회의의 향방을 결정지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어 5월 12일 회의에서 제기된 정인교의 긴급제 의에 대하여 윤자영, 오영선, 선우혁, 백남준, 서보라,  조상섭, 김상한, 윤경일 등이 격렬한 반대론을 제기 하여 회의가 정회되었다. 이들은 정인교의 긴급제안 이 “대표의 제안권을 유린함”이며, 과거의 분규 문제 를 해결하지 않고 “2개의 정부를 산출하자 함”이라 고 비판하였다. 이후 5월 16일의 회의에서 10명의 ‘개조파’ 대표들 이 탈퇴를 성명하고 퇴장하였다. 이어 5월 18일에는  앞서 탈퇴·성명한 10명을 포함한 41명의 대표들이  회의를 부인하는 통고문을 보내왔다. 대표회의의 파 열이 현실화된 것이다.   ‘창조파’ 단독에 의한 새로운 중앙기관 ‘국민위원회’ 의 창설 5월 19일 개조파의 반발과 대회 탈퇴를 불러왔던  정인교의 긴급제의가 가결되고 의정 순서에 따라 국 호문제에 대한 제의를 받아 국호를 ‘한(韓)’으로 하자 는 안이 제출되었다. 6월 2일 회의에는 개조파 45명 이 연서한 제2차 통고문, 그리고 부의장 안창호의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