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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의 이런 행동은 어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만의 감성적 행동이었다. 임정 일행은 미군이 제공한 차 를 타고 숙소인 죽첨장(竹添莊, 이후 경교장으로 불 림)으로 갔다. 한국을 떠난 지 26년 만에 돌아 온 김 구의 감정은 온통 나라 걱정뿐이었다. 하지, 중앙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귀국 사실을 알림 임정 요인들의 국내 귀국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이승만 정도였다. 일반 민중은 고사하고 우익의 정당 관계자들도 몰랐다. 하지 장군 은 오후 6시 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임정 1 진 귀국 사실을 알렸다. 그의 성명은 짧고도 임정 성 격을 분명히 규정했다. 그는 “오늘 오후에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망명했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 이다.”라는 짤막한 공식 성명을 냈다. 김구 등 임정 요인 귀국 사실을 알고 있던 이승만 이 오후 6시를 넘겨서 죽첨장으로 찾아왔다. 여기서 김구와 만났다. 곧이어 경성방송국 기자 문제안(文濟 安)이 죽첨장에 왔 다. 임정 요인 귀국을 확인 한 그는 귀국 소식을 보도했다. 이를 들은 많은 시민과 기자들이 한꺼번에 죽첨장으로 몰려들었다. 저녁 8시 김구는 기자들과 잠시 만났다. 기자들이 38 선 문제에 이어 어떤 자격으로 입국했냐고 물었다. 김구는 “나는 … 장차 에는 임정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나의 동지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좌익 · 우익 인사들 앞 다투어 ‘죽첨장(竹添莊)’으로 임정 요인들이 한국에 온 다음 날인 21일에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죽첨장으로 모여들었다. 맨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였다. 뒤 이어 국학자 정인보, 변호사이자 한민당원 김병로, 임정 환영회를 주관하고 있던 김석황(金錫璜), 국민 당 안재홍, 인민당 여운형, 한국광복군 국내지대를 이끌던 오광선, 3·1운동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권동진, 성균관의 김창숙, 인민공화국의 허헌 등이 죽첨장을 찾아왔다. 이날 죽첨장을 찾아와서 이시 영, 김규식 등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운형이 경비대 에 쫓겨나와 몸 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어갔던 유명 한 일화가 남아 있다. 김구는 11월 24일 아침 9시 30분 엄항섭과 함께 돈암장(敦岩莊)으로 갔다. 돈암장은 이승만이 집무를 보고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방문에 건립 당시 죽첨장(경교장). 금광으로 큰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이 초호화판 별장으로 1938년 지 은 죽첨장의 건립 당시 모습이다(오마이뉴스 이 영천 제공) 김구 주재로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경교 장 2층 응접실(서재)의 모습(복원, 『정책브리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