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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5년 2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2 · 8독립선언을 다시 본다’ 학생을 압박하여 유학생 친목회에서 발간하는 학보 발행을 금지하고 그 회합을 간섭하고, 조선유학생의 회합은 어떤 내용인지를 불문하고 회합의 일시 장소 를 미리 보고하게 했으며 임원이 달라질 때에도 즉 시 신고하도록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집회를 금 지시키기도 했다.”(청구생(靑邱生),「조선청년의 고 통」,『제3제국(第三帝国 )』5호, 1914.2.1) 이와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대놓고 뜻하는 바 거사를 도모할 수는 없었다. 일제 당국의 감시망 사이를 누비며 거사 준비, 독립선언서 작성 먼저 1918년 12월 29일경 학우회의 주선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 최한 웅변대회를 구실로 11명의 대표로 서,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서춘, 김철 수(金喆壽), 김상덕, 이광수, 송계백, 이 종근, 최근우, 김도연을 선출했다. 그러 자, 이들에 대한 일제 측의 감시와 미행 이 강화되어 본격적인 준비를 할 수 없 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일제의 감시망 을 따돌리기 위해 작전을 짰다. 1919년 1월 중순 모임에서 송계백, 최팔용, 백 관수가 시기상조론을 들며 운동 결행을 주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서춘과 윤창석이 맹렬히 공격을 함으로써 이들 이 분열된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 정보는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강경론을 주장한 윤창석, 서춘, 김상덕, 김도연, 최근우에게는 밀정이 붙었지만, 최팔용, 송계백, 백 관수에게는 일제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이를 이용하 여 최팔용은 거사 준비를 총괄했으며 송계백은 선언 서 초안을 학생모 안감에 숨겨 휴대하고 1919년 1월 하순 서울에 가서 2·8독립운동 계획을 최린, 현상윤 등에게 전달함과 아울러 메이지대학에 유학했던 선 배 정노식으로부터 운동자금 3천원(현재 가치 약 6 천만원)을 받아올 수 있었다. 백관수는 선언서 등사 2 · 8독립선언서 앞 부분과 끝 부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