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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것은 오직 2천만 민족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미주 한인들은 황실과 정부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관이 절실 히 필요하였다. 이때 한인자치기관으로 역할한 기관 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였 다. 미주 한인들은 공립협회를 대한제국을 대신하는 “우리의 공사관과 영사관”으로 인식하였다. 신민회와 통일연합기관 설치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1년간 미주 한인 조 직을 정비한 공립협회는 국권 회복의 선결 과제로 국민 단합을 주장하였다. 이미 황실과 정부가 제 역 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였기에 국권 회복의 주체로 ‘국민’을 설정하고, 국민이 단합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것이다. 1907년 1월 초순, 공립협회 총회장을 역임한 안 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모여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 하였다. 이때 작성된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통용장정 (通用章程)은 향후 국권 회복과 함께 신국가 건설을 1905년 공립협회 총회장 당시의 안창호(독립기념관 제공) 「國의 存亡은 國민활동 與否에 在함」논설(『공립신보』 1907 년 8월 16일자). 독립전쟁을 시작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한인 자치기관’ 설립을 제안하는 논설을 실은 『신한민보』(1910 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