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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4년 12월 Special Theme  정의부 창립 100주년 기념 특집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공’ 통합단체를 지향한 대한통군부는 이러한 노력으로 성립되었다. 대한통군부는 1922년 1월 23일 관전현 양자구에서 결성되었다. 대한독립단·광한단·특무부 (한교공회)·남만통일후원대 등이 남만군민통일회를 열어 통합을 결의한 결과였다. 하지만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을 대표하기에는 아 직 부족했다. 통합단체를 지향했으나 여전히 대한통 군부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에 서로군정서 의용대장 김창환이 1922년 6월 2일 「윤시」를 발표했고, 대한통군부가 1922년 6월 3일 중앙직원회를, 6월 20일 제1회 총관회를 열었다. 게 다가 양기탁이 주도한 남만촉성회도 8월 2일 제2회 회의를 열어 서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촉 구하였다. 1921년 12월부터 1922년 8월 초까지 일련의 노 력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는 새로운 통합단 체가 서간도에서 결성되었다. 1922년 8월 23일 환 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대한통군부 간부 및 각단(各團)·각회(各會) 대표자가 모여 남만한족통 일회를 열고 통일을 협의하여 대요 (大要)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남만한 족통일기관’인 대한통의부의 결성을 알리는 동시에, 서간도를 비롯한 만 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참여를 주창 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산하에 의용군을 편 성하여 국내 진공을 전개하였다. 대 개는 일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일 본 군경을 처단하는 활동인데, 1919 년부터 서간도의 여러 독립운동단체 가 추진한 국내 진공의 임무를 인계받은 것이다. 의 용군이 특파된 지역은 국내 평안북도 지역이 주를 이뤘는데, 이는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 이전의 독립군단이 국내 진공한 지역과 동일하였다. 의용군의 국내 진공은 사실상 한인 자치의 기반을 다지는 활동이었다. 독립운동의 근간이었던 한인사 회는 때때로 월강하는 일본 군경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의용군은 동포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 진공을 전개했던 것이다. 대한통의부가 ‘군력(軍力) 을 확장하여 수적(讐敵)을 격퇴’하는 것과 함께 ‘한족 (韓族)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총관소(總管所)의 총관과 구역의 구장은 지 방조직의 장으로 관할구역 내 한인들의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한인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총관 소와 구역은 대한통의부가 결성될 때부터 각지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2년 12월 29 일 열린 제1회 중앙회의에서 총관소 16개, 구역 5개 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는데, 이때 환서총관(桓西總管) 대한통의부 총장 김동삼 (1878~1937, 김동삼기념사업회 제공) 대한통의부 검무국장 최명수 (1881~1951,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