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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4년 11월 Special Theme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 제95주년 특집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시 본다’ 운동 방식에서도 이 시기의 동맹휴학(이하 맹휴) 은 1920년대 초에 비해 조직성과 투쟁성이 더욱 강 화되었다. 맹휴 전개과정에서 개별 학교 차원의 투 쟁지도본부가 결성되기도 했다. 동조맹휴 등 연대투 쟁이 제기되어 개별 단위 학교 차원의 맹휴가 학교 간 연대투쟁, 지역 차원의 투쟁으로 발전하는 경향 을 보였다. 또 학생운동이 단순한 맹휴투쟁에 그치 는 한계를 극복하고 시위운동이나 대중과의 연계투 쟁이 시도되고 있었다. 아울러 학생운동 조직도 발전했다. 1923년 조선 학생회, 1925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단체가 결성되어 학생역량을 결집해갔다. 1926년 6 · 10만세 운동은 사회과학 독서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 가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 단위로 비밀 독서회를 만 들어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민족의 장래를 고민했다. 192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의 역량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1 · 3학생독립운동 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전국적 시위운동 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의 발발과 전국 확산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인 여학생을 밀친 일로 인해 광주로 통학하던 한일 학생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11 월 3일 광주역전에서 광주고등보통학 교와 일인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 수 십여 명이 집단격투를 벌였다. 이어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광주농 업학교,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전개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를 처리하면서 수십여 명의 한인 학 생들만을 편파적으로 검거 구속하여 한인 학생에 대 한 차별대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러한 민족차 별에 항의하여 11월 12일 광주에서 2차 시위가 일 어났다. 이후 ‘광주 검거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 폐’ 등을 요구하며 전남지방의 각급 학교에서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다. 광주에서 촉발되어 11월 전남지방으로 확산되던 시위운동은 12월초 서울로 전이되면서 전국적인 양 상으로 발전했다. 서울에서는 12월 5일부터 16일까 지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하여 각종학교, 보통학교 등 모두 30개의 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또는 맹휴를 전개했다. 이로 인해 총 1천 4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서울의 거의 모 든 중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1926년 광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만든 항일 비밀결 사 성진회의 주요 구성원들(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성진회는 광주학생운동의 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두번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광주학생운동 전후 크 게 활약한 장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