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32 2024년 9월 Special Theme 한국광복군 창설 제84주년 특집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작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 한민국임시정부 안에서는 ‘독립외 교노선’보다 ‘독립전쟁노선’이 더욱 우세해졌다. 이에 따라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重慶)에 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 였다. 역사적으로 세계 열강이 특정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공동으로 약 속한 유례가 없고, 독립을 열망하는 100여 개 약소 민족들이 있었지만, 오직 한국만이 연합국에 의해 문서 로 독립 보장을 약속 받았다. 이는 실 로 임시정부의 독립외교 노력과 독 립전쟁 노선의 승리요, 한국광복군 의 연합작전 수행 성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광 복군 뒷받침 하에 임시정부가 중국 을 움직였고, 중국이 미국을, 미국이 영국을 각각 움직인 결과였다. 이렇 게 보면 결국 한국광복군의 연합작 전 성과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 을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독립전쟁 노선 : 만주지역 독립군 통합, 대 일특무공작 제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T. W. Wilson)의 ‘민족자결주 의’에 크게 고무된 한국인들은 1919년 3월 1일 열강에게 독립청원을 통한 독립을 기대하고 비폭력의 독립만세운동(이하 ‘3·1운동’)을 일으 켰다. 이 과정에서 조직적, 장기적으로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할 필요성 을 느낀 민족지도자들은 중국의 상하이(上海)에 모여 「대한민국임시헌 장」을 제정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를 수립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8.29) 이후 다수의 한국인들이 일제의 무단 통치를 피해 만주(중국 동북지방)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였고, 신민회 회원들 주도로 한인촌을 형성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이 발발하자 양성된 독립군으로 독립 군부대를 편성하여 1920년대에 항일유격전과 국내진입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다.(아래 지도 참조) 1919년 12월 임시정부는 독립청원외교보다는 무장혈전을 통해 독 1920년대 무장독립군 단체와 활동영역(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