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32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론(讀史新論)』에서 그동안 묘향산으로 이해해오던 단군발상지를 백두산이라는 주장을 처음 펼쳤다. 백 두산 고원에서 일어나 압록강으로 내려와 부근 평원 에 산재하였으니 강의 서쪽 요동과 강의 동쪽 조선 이 곧 단군이라는 것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는 ‘단군자손’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해 역사적, 혈연적, 문화적 측면에서 단군과 현재의 대한제국을 연결시켜 이해하기 시작했다. 단군은 민족의 공통 시조인 신성한 존재이며 단군을 매개로 민족 구성원 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단군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당시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격화 하면서도 민족정체성 확인의 근거로 이해했다. 단군 이 강림한 ‘태백산’이 곧 백두산임을 분명히 하고 백 두산을 신성시하였다. 대종교는 1912년에 백두산 북쪽 화룡현 청파호(淸波湖)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이해에 대종교는 백두산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였 고, 개천절에는 청파호에서 제천의식과 제산의식을 행하였다. 나철은 지상천국의 낙원을 백두산을 중심 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보았고, 대종교의 4도 교구도 백두산을 중심으로 설정했다. 대종교의 포교가 시작되자 북간도와 서간도 및 연 해주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참여하였다. 박은식 은 1911년 서간도 회인현에서 쓴 『몽배금태조(夢拜 金太祖)』에서 “이땅은 우리 선조의 고토이다. 지금 그 여도(輿圖)의 전부를 살펴 고대의 유적을 찾으니 백두산은 단군대황조께서 발상하신 땅”이라고 하였 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천개소문전(泉 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단 조사고(檀祖事攷)』 등도 이 시기 서간도에서 집필하 였다. 만주와 요동이 모두 한민족의 고대활동지였 으며, 특히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역사에 주목하 여 고구려계 대조영이 유민들의 염원을 안고 고구 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발해를 건국한 것은 ‘단군 구강(舊疆)의 회복’이자 ‘고구려의 부흥’으로 대동민 족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평가하였다. 이 는 곧 백두산 남북의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는 벌어 지고 있는 우리 독립운동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한 것이었다. 백두산이 우리 역사의 발상지라는 인식은 1920년 대 들어 국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이를 더욱 확 산시켰다. 이들은 학술기사나 기행문을 통해 백두산 을 단군의 탄강지(誕降地)로 설명하였다. “백두산은 과거 불함산, 개마산, 태백산, 도태산, 혹은 백악이라 하였고, 두만, 압록, 송화 세 강이 여기서 발원하며 조선의 개국시조인 단군이 여기에 강림했다”라고 하 였다. ‘조선민족의 옛 역사의 발원지’, ‘백두산 단목 (檀木) 아래에 단군 강림’이라는 이야기는 대종교 뿐 만 아니라 지식인과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최남선의 『백두산관참기(白頭山覲參記)』나 안 재홍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에서 더욱 선 명하게, “조선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산으로 서, 그 최초의 무대를 삼아서 이른바 ‘홍익인간’의 희 막(戲 幕, 놀이무대)”에 따라 만주가 단군의 강역임을 강하게 역설하였다. 이로써 단군과 백두산은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원 천이 되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민족의 영산(靈山)’으 로 자리잡았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개천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