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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4년 3월 Special Theme 3 · 1운동 105주년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특징”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연구자에 따라서는 민족대 표의 행적을 문제 삼으며 과연 그들이 ‘민족대표’의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을 제기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3 · 1운동을 계획하고 이후 운동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평안도에서 그렇게 많은 민 족대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는 민족대표의 구성 에서 그 일말의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 민 족대표 33인은 천도교계 15인, 기독교계 16인, 불 교계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평안도에서는 천도교계 4명(임예환林禮煥·나인 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나용환羅龍煥)과 기독교계 7 명(이승훈李昇薰·김창준金昌俊·양전백梁甸伯·이명룡 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 祚)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당시 평안도지역의 기독 교세와 천도교세가 전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것과 관 계가 깊다. 평안도 출신 민족대표들은 자신들이 활동하던 지 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이끌었으며, 그 필두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대실업가이자 오산 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이승훈(1864~1930)이었 다. 1910년 기독교에 귀의한 그는 3 · 1운동의 계획 단계부터 기독교계 인사들을 대표하여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협의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모두 알고 있 는 ‘민족대표’가 구성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 · 1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키다 평안도지역 3 · 1운동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운동 의 ‘신속성’이다. 평안도의 3 · 1운동이 타지역보다 빨 랐다는 것인데, 이는 운동의 발생 시점이 빨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빨리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전자와 「전보: 평양의 3월 1일 만세시위」,『조선소요사건관 계서류』(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조선주차군사 령관의 평양 시위에 관한 비밀 전보) 평안도지역 3 · 1운동을 주도한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