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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재주 조선인징용에 따른 협화회의 지도에 관한 건」 (1942년 9월 23일)이다. 재일조선인 가운데 징용 대상자는 성인 남성만이 아니었다. 1931년 8월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정자는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해 나라(奈良)현 야마베(山邊) 군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가 1944년 7월 근로보국대 로 나라현 덴리(天理)시에 있는 해군 야나기모토(柳 本) 비행장에 끌려갔다. 이곳에서 소녀는 모래를 이 고 흙을 날랐다. “독자들이여, 나와 함께 다마가와(多摩川) 벌판에 서 보자. 자갈을 캐는 곳, 내 고향 대구 부근의 하천 에서 매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는 가까이 있는 산 들을 보고 하천을 걷고 여성들의 자갈 캐는 것을 보 면서 마치 내 고향 하천에 서 있는 듯 착각하기도 한 다. 내가 착각을 일으키는 이유는 이곳의 집들이 마 치 조선의 농가와 같기 때문이다. 말은 모두 조선말 이고 조선 김치도, 고추도 있다.” 1937년 르포(조선인취락을 간다)에서 장혁주(張 赫宙, 창씨명 노구치 미노루)가 묘사한 도쿄 인 근 다 마가와 하천변과 시바우라(芝浦) 조선부락의 모습이 다. 친일 작가로 살았던 장혁주가 고향으로 착각할 정도로 익숙한 곳, 바로 재일조선인의 해방구, ‘조선 부락’, ‘조선인 부락’, ‘조센쵸(朝鮮町)’다. 조선부락은 슬럼 혹은 바라크 지역이라 불리기도 하는 일본 하층 거주지구의 일종이었다. ‘햇볕이 들 지 않는 거리’라는 별칭을 가진 것을 보면, 열악한 주 거지역임을 알 수 있다. 조선부락은 오사카 · 교토 · 도쿄 · 가나가와 · 요코하 마·규슈 등 주요 도시에 있었던 조선인 타운이었다. 1907년 히가시나리구(東成區) 히가시오바시쵸(東小 橋町) 157번지에 최초의 조선부락이 탄생했다. 조선 인들이 조선부락을 만든 것은 일본인 마을에서 집을 빌려주지 않아 거주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없으면서도 있는 동네’ ‘보이지 않는 동네’이지만 “다들 목청을 돋우고” ‘활개 치는 씩씩하고 활발한 동 네’. 시인 김시종이 ‘장편시-이카이노(猪飼野)시집’의 첫머리에서 표현한 조선부락이다. 정자가 만들었던 야나기모토비행장 방공호(위원호 『강제동원 구술기록집6 - 수족만 멀쩡하 면 막 가는거야』, 2007, 193쪽) 장혁주(1905~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