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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1885-1943
유학자 집안에서 유학자 집안에서 한학을 배우던 백산은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로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자, "나라가 망해가는데 선비가 시대에 맞지 않은 옛날 책만 읽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늡니까?" 라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을 배웠다. "나라가 망해 가능해 선비가 시대에 맞지 않은 옛날 책만 읽고 실생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학문을 통해 실력을 양성한 양성한 백산은 국권회복을 위해 무었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읍에 의신학교, 고향인 이곳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열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연락기관이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의 60% 이상을 조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애국청년학생들을 유학시켜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며, 중외일보를 발행하여 언론을 통헌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과 만주 동경성에 발해농장 설립을 통해 독립투쟁의 해외 근거지를 개척하였다. 1943년 일제에 의한 탄압과 고문으로 순국하는 그날까지 백산의 삶 자체는 오롯이 독립운동이었다.
해방이 되고 고국으로 귀국한 백범 김구선생이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사람, 사상의 고취자, 민족교육의 선각자, 민족자본의 육성자, 민족언론의 선구자이면서 독립투사였던 백산 한의제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