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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혼이 왔는지, 육체까지 왔는지” 임시정부 요인들의 한국 귀국까지 둘러싼 이야기들 31 보냈다. 맥아더는 이날로 임정 요인 귀국을 승인했 으며, 이를 주중 미국대사관에 알렸다. 주중 미국대 사관은 이를 중국 국민당에 알려줬다. 이 소식을 접 한 오칠성은 11월 21일 상해에서 머물고 있던 김구 에게 귀국 승인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임정 요인 귀국의 실무적 책임 담당자인 하지 장 군은 11월 20일 C-47(이 비행기의 실물은 독립기념 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음) 프로펠러 수송기 한 대를 상해로 보냈다. 문제는 하지 장군이 보낸 수송기는 한 대이며, 탑승인원은 15명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국 1진으로 갈사람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나름의 내부 진통을 거친 다음 주석 김구, 부주석 김 규식, 가장 나아기 많은 국무위원인 이시영, 문화부 장 김상덕, 참모총장 유동열, 선전부장 엄항섭이 1진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수행원으로 김진동(김규식의 아들, 영어에 능통함), 안미생(김구 며느리이자 안중 근 동생 안정근의 장녀임), 비서 장준하와 민영완, 윤 경빈과 선우진(鮮于鎭) 등 경위대원 4명 등이 명단에 등록됐다. 김구 등 1진을 태운 C-47 수송기는 오후 1시 를 조 금 넘겨 상해를 출발하기 시작했다. 수송기는 청도 (靑島)에서 서울까지 직선으로 날아갔다. 두 어 시간 남짓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보인다!”고 외쳤 다. 조국이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26년 동안 한번 도 가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마음은 메어졌다. 어 떤 사람이 애국가를 조용히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 다. 이들이 흘린 눈물 안에는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야만 했던 서러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 등 이 착종(錯綜)되어 있었다. 드디어 C-47 수송기가 김포공항에 무사히 착륙했 다. 이때 시간은 오후 4시였다. 환영 나온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다. 몇 명의 미군 장교만이 이들을 안내 했다. 수송기에서 내린 김구는 땅바닥의 흙을 한줌 쥐고 흙냄새를 맡았다. 이내 하늘을 쳐다봤다. 그토 록 보고, 걷고, 만지고 싶었던 땅과 하늘이었다. 김구 임시정부 중경 청사에서 요인들 의 환국 기념촬영 사진(1945년 11월 3일). 맨 앞줄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백범기념사업회 제공) 철저히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김구 등 임정 요인1 진 의 김포비행장 도착을 보도한 『서울신문』 호외(1945 년 11월 23일, 이영천 제공) 환국을 위해 중경에서 상해공항에 도착한 김구와 이 동녕, 안미생 등 일행. 앞줄 가운데 김구, 오른쪽 안 미생, 그 옆 눈물짓고 있는 이가 이시영(오마이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