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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결행된 도쿄 2 · 8학생독립운동 31 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국민이 얼마나 독립을 갈망하는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 조선인 의 뜨거운 독립에 대한 의지 표명이 필요한 시점이 었다. 도쿄 유학생에 대한 감시와 사찰 양상 누가 먼저 총대를 멜 것인가? 도쿄 유학생들은 주 저하지 않았다. 평소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 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짐했던 것을 실천 해야 할 때가 바야흐로 도래했다고 확신했던 것이 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도쿄 유학생들 대 부분은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생에 대한 감시와 사찰의 실상은 어 떠했을까? 1917년 12월 현재 일본에 거주한 한인은 14,502명으로 대부분 노동자인데, 이 중 ‘시찰’이 필 요한 자는 1919년 1월 1일 현재 188명이었고, 이중 학생이 186명인데, 도쿄에만 119명의 학생이 있었 다. 따라서 요시찰 대상자 중 대부분이 도쿄 유학생 이었던 셈이다. 한인 유학생에 대한 감시는 시모노세키에 도착 하 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관부(關釜)연락선 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열차로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10회나 검문과 취조를 받을 정도였다. 도쿄 에 도착하면 관비유학생은 관련 서류를 첨부하여 지 체 없이 유학생 감독에게 제출해야 하고(「조선총독 부 유학생규정」 제3조), 사비 유학생의 경우도 주소, 이수 학과, 입학할 학교, 입학 시기를 적은 이력서를 첨부하여 유학생감독에게 제출해야 했다(위 규정 제 17조).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신한민보』(「유학생 감 옥」, 1911.9.13)는 일제가 유학생 1인당 정탐군 별순 검 3~4명씩을 붙여 뒤쫓아 다니게 하고 있다고 보도 한 적도 있다. 유학생감독부의 사찰 현황은 김우영 이 다음과 같이 밝힌 데에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도쿄 고지마치구[麹 町區]의 전(前) 재일본 대한제 국 공사관은 일제 강점 후 기숙사 설비를 하여 유학 생감독부로 바뀌었는데, 유학생 감독 촉탁인 헌병 출신의 일본인은 공공연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명의로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발표된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