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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1 · 3학생독립운동의 전개와 의의 31 11 · 3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의 시위를 시작으 로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 개된 학생 독립운동을 말한다. 흔히  광주학생운동으로 불린다. 11 · 3학 생독립운동은 학생운동사와 민족운 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학 생이 중심이 된 3 · 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며, 1920년대 학생운동 과 민족운동 역량의 총결산이라는 점 에서 그러하다. 또한 11 · 3학생독립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후 1930 년대 노동, 농민운동과 국외 독립운 동에 투신했다. 이는 11 · 3학생독립 운동이 1930년대 민족운동의 연결 고리로 역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1920년대와 30년대의 가교역할 을 수행한 민족운동이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의 시위를 시 작으로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 독립운동을 말한다. 흔히 광주학생운동으로 불린다. 3 · 1운동, 6 · 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 하 3대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광주에서 촉발된 11 · 3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학생운동의 성장에 기초한 것이었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성장 1920년대는 3 · 1운동 이후 근대적 교육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학 생 수가 급증했다. 1919년 당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교 수는 517교, 학생은 8만 9천여 명이었으나 1929년에는 1,584개 학교에 학 생 수가 47만여 명에 달했다. 10년만에 학교 수는 3배, 학생 수는 5배 로 증가한 것이다. 중등학교 학생의 경우 1919년 5,064명에 불과했으 나, 1929년에는 29,105명으로 6배 가까이 증가했다. 1920년대 학생층이 크게 증가한데 반해 학교시설은 미비했으며, 무 자격 · 무자질 교사도 많았다, 더욱이 한인 학생에 대한 민족차별이 교육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일본인 교사의 민족 모멸적 태 도는 학생들의 반감을 야기했다. 교육과정도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노 예적 식민지교육이었다. 교과과정은 일본어의 습득과 일본정신의 주 입에 맞추어 구성되었다. 일제는 특히 역사, 지리 등을 통해 일본의 위 대성과 ‘한일병합’의 당위성을 강조하려 했다. 독자적인 한국사 교육은 없었으며 일본사에 부속되어 임나일본부 등 식민사관을 강조하는 것만 가르쳤다. 한글교육은 최소한으로 축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인 6 · 10만세운동 이후인 1927년을 기점으 로 동맹휴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내용적으로도 종래의 학교시설 개선요구 등을 넘어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비판하며 ‘조선인 본위 의 교육’을 주장했다. 설비문제, 교원자격 문제 등 개별 학교 차원에서 ‘조선역사 교육’ ‘조선어 교육의 강화’등을 요구하며 교과과정이나 식 민지 교육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