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age

Special Theme • 괴정 오상규의 한북흥학회 · 서북학회 활동과 애국계몽운동 31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거의 상실되자 국권회복운 동이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으로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한 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인  독립협회운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민족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전 국 도시의 자산가, 관료, 개혁적인 유 학자, 신지식층들이 주도하였다. 현 직 관료 중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  괴정(槐庭) 오상규(吳相奎)였다. 그 는 을사늑약 이후 자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양 성을 목적으로 한 계몽운동의 일환으 로 사립학교설립운동과 국민계몽운 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민족운동 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인생 역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 외 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1906년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의 통치권이 거의 상실되자 이를 대신하여 국권회복운동이 시작되었다. 국권회복운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무력에 의한 항일의 병운동과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인 독립협회운동을 계승하고 발전시 킨 민족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전국 도시의 자산가, 관료, 개혁적 인 유학자, 신지식층들이 주도하였다. 현직 관료 중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괴정(槐庭) 오상규(吳相奎)였다. 그는 1858년 함경북도 회령 출 신으로서 22세 되던 1897년 조병하와 정기세의 추천으로 왕명출납과 군무 처리 등을 담당하는 선전관 6품의 무관직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 다. 그 후 1883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제 국기 광무개혁 당시 농상공부 철도국, 중추원, 평리원, 탁지부, 중앙은 행 등에서 고위 관료로 재직했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강화군수로 임명 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을 가진 오상규는 을사늑약을 전후로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국민교육회 활동을 시작으로 한북흥학회 초대 회장 과 서북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현직 관료로서 한말 애국계몽운동 을 주도하였다. 일제강점기 회령 읍내 중심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