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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간도, 백두산 인식과 독립운동 31 민문제에서는 한인들이 청국의 법적 통치하에 귀속 시키는 것이었다.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민족운동을 위한 해외 기 지 건설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간도와 서간도는 독립운동의 중심기지로 주목받 았다. 거주 한인들을 배후로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 고, 동시에 넓은 빈 땅을 이용한 전통적 병농일치의 구상에 따라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은 독립운동의 기 지가 되었다. 민족의 발상지가 되어 민족의 상징으로 올라선 백 두산 조선시대 백두산은 한반도 모든 산들의 조종(祖 宗)이 되는 조종산(祖宗山)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조 선후기에 이르러는 백두산을 머리로, 산천을 신체의 사지로 생각하는 유기체적 국토의식도 등장하였다. 숙종대 백두산정계 이후에는 백두산을 역사적 영토 였던 요동(遼東)지역까지 포함한 북방영토의 중심으 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영조(英祖)대에는 백두산에 국가 제례를 올리며 두만강과 함북 경흥지역과 연결 하여 성역화를 시도했고, 이곳을 탐방하여 기행문을 남기는 지식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만산의 근원인 곤륜산(崑崙山)의 한 지맥인 백두산이라거나 서방의 곤륜산과 양립하는 동방의 백두산이라는 인 식이 많았다. 소중화의식에서 나온 산천관으로, 조 선이 ‘중화(中華)’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보여주는 영 토적 지표로 백두산이 인식되었다. 한말 민족의 위기 속에 백두산은 민족적 아이덴터 티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1908년 신채호는 『독사신 「백두산정계비지도」, 1904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토문강≠두만강 의식을 보여주며, 두만강 하 류 일대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보여주는 대한제 국 내부 지도이다. 「대한전도」, 1907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북간도 와 토문강이 보인다. 북간도는 ‘함북간도’의 줄임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