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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재기 허위의 선발대는 동대문을 향해 망우재를 넘는 도중에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화력과 병 력, 기동력 등에서 열세인 허위 부대는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지만, 가공할 일본군 화력에 본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늦게 도착한 의병진, 수택리를 향해 진군 중인 의병들은 서울진공작전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다시 각처로 돌아가 재기를 도모하여야 했다. 항일의병전쟁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효사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이인영의 귀향 사건 이다. 전국적 의병연합체 총대장으로서 막중한 책 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신념인 유교의 충효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항일의병전쟁을 국민적 인 저항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가장 큰 요인이라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서울진공작전의 난관과 좌절 13도창의군에 가담한 전국 의병진의 서울을 향 한 거침없는 진격에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 본은 서울 외곽의 방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서울진공작전에 대한 사전정보를 입수한 대로 각 처에서 양주로 향하는 의병의 진로를 미리 차단하 고,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시켰으며, 동대 문 일대에는 중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고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했다. 이때 대진소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고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 소식을 듣고 귀향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창의군의 해산을 일방적으로 통 보하였다.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은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총지휘를 맡게 됐다. 군사장 허위는 전 열을 다시 정비하면서 계획대로 진공작전을 수행 하기로 결정하고 후속부대들의 진군을 기다렸다.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13도창의군은 서울을 공격하는 데 있어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을사늑약 및 정미7조약을 파기하고 통감 부를 몰아내어 국권을 회복하는 것. 둘째는 의병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건설해 나라의 자주독립을 공 고화 할 것을 주장했다. 허위 의병연합부대 주둔지 및 훈련장(양주시 감악산 일대) 13도 창의군 총집결지(구리시 수택동 한강변 일대) 13도창의군 총집결지와 기념비(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장자호수공원) 전국 의병에게 배포된 호소문을 받은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각처에서 진군을 시 작했다. 1908년 12월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 수택동 일 대)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이 통합 의병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를 세우고, 관동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허위는 작전참모장격인 군 사장을 맡았다. 13도창의군 각 대진소들은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했다. 이때 양주로 집결하기로 한 의병 수는 총 48진 1만여 명 에 이른다. 허위의 경기도 진동창의군 2천 명을 비 롯해 강원도 민긍호 의병 2천 명, 이인영 의병 1천 명, 이강년 의병 500명, 황해도 권중희 의병 500 명, 전라도 문태수 의병 100명, 평안도 방인관 의 병 80명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