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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홍범도를 도운 동지들 - 차도선 · 박경철 · 이병채 31 을사5조약(을사늑약) 후에는 많은 의병을 동원했다 가 정부 당국의 권유로 해산하였다. 1913년에는 비 밀리에 전라남북도 순무중군(巡撫中軍)의 칙명을 받 기도 했지만, 항일투쟁은 실현하지 못했다. 이후 두 만강을 건너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를 왕래하 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19년 12월 홍범도 의 대한독립군 참모로 활동했다. 이 때 발표한 ‘유고문’에서 평화적 시위 만세운동 방식이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에서의 외교적 활 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장투쟁에 의해 독립 을 달성할 수 있다는 무장독립전쟁론을 강력히 주장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대장 홍범도, 참모 박경철 등과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그는 1920년 5월 28일 성립한 홍범도 · 안무 · 최진동 3단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했을 때, 북로제1군 사령부 부장 홍범도 휘하의 참모로 활 동했다. 같은 해 10월 말 청산리전투를 치른 뒤에 북 만주로 북상한 홍범도 · 김좌진 독립군 부대와 함께 러 시아로 넘어가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1921년 봄 홍범 도와 함께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이동했다. 연해주에 서 북간도를 거쳐 자유시 로 이 동할 때까지 줄곧 홍범도와 함 께한 홍범도의 최측근 동료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1921년 6월 28일 자유 시사변으로 피해를 입은 허근 (허재욱) 독립군 부대의 피해를 호소하고, 가해자측의 진상규 명과 피해자측의 원상 회복조 치를 탄원 · 호소하는 일련의 활동을 전개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1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한국의병대 표’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허근과 함께 행동 했으며, 극동민족대회(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에도 참가하였다. 이병채는 허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자유시사 변에서 간도에서 온 의병부대가 피해를 많이 입었으 니 유죄무죄를 가려달라는 보고서를 1921년 11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이후 이르쿠츠크로 돌아가지 않고 모스크바에 체류했다. 그러나 말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다. 고흥군 과역면에 있는 이병채 기념비(고흥군청 제공)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과 성균관대 연구교수,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 수선사학회 회 장 등을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봉오동 ·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일제강점기』 (공저) 등 논저가 있다. 2023년 1월부터 『순국』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홍범도 · 최진동의 동지 허근  (본명 허재욱, 일명 허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