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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말 전기 · 중기 의병의 봉기와 항전 – 홍주의병을 중심으로 31 에는 박창로가 수백 명을 이끌고 왔으며 청양에서도 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고 수백 명이 홍주성으로 집결하였다. 김복한은 관찰사 이승우를 의병에 끌어들여 의병 부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 하고 김복한은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창의 소가 설치된 지 하루가 지나 12월 3일 홍주의병은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김복한을 비롯한 의병 지 도자 23명이 체포, 감금되었다. 김복한은 서울로 압 송되어 10년 형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고 다른 지도자들 역시 전원 사면 석방되었다. 전기 홍주의병이 실패한 이후에도 청양군수 정인 희와 이세영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또다시 실패 로 끝났지만, 박창로,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이 그대 로 중기 의병에서도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아 전기 의병은 중기 홍주의병에 인적 기반을 제공하는 등 깊은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복한, 이 설도 중기 의병 준비과정에서 민종식과 접촉하 고 있 었다. 중기 홍주의병의 재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 본은 강제로 을사보호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에 홍주지역 유학자들 은 다시 의병을 일으 켰다. 김복한과 이설은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민종식과 안병찬에게 의병을 다 시 일으킬 것을 권하 였다. 민종식 역시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정 산으로 낙향하여 은거하고 있었다. 전기 홍주의병이 김복한, 이설, 안병찬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면, 중기 지산 김복한 경복궁 안의 ‘명성황후 조난지지’ 기념비(한국학중앙 연구원 제공) 민종식 의병장(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