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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31 동이 펼쳐진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도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도항 하는 유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 시였다. 일례로 1910년대 500~600 명 정도였던 재일한인유학생은  1918년 말 769명이 되는데, 그 중  642명이 도쿄 유학생일 정도였다. 이 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 가 1919년 전후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큰  토대는 1919년 2 · 8독립운동이다.  1919년 2월 8일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쿄의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오전 10시 에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일 본 정부 대신 및 귀족원과 중의원, 주일 각국 외교공 관, 조선총독부, 언론사에 발송하고 오후 2시에 200 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유학생대회를  개최했다.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했으며, 백관 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 독했다. 3시 50분경 간다경찰서에서 출동하여 주동 학생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은 학생들은 항쟁을 지 속했다. 2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는 기숙사에 서 80여명이 동맹 퇴사를 단행했다. 또한 2월 12일 에는 히비야공원에서 제2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재 일유학생들은 국내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속속 귀국 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 귀 국한 학생 수는 360여명에 달했다. 2 · 8독립운동의  주동학생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도쿄지방재판 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6월 10일 재판부는 최팔용 과 서춘에게 금고 1년,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윤창 석에게 금고 9개월,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에게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했다. 이광수는 후속 활동을 위해  거사 전에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최근우는 거사 후  도피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세했다. 2 · 8독립운동의 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아 쉽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해버렸다. 1929 년 사루가쿠초(袁樂町)에 회관을 신축했고, 그 후 다 시 재건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국호텔과 여운형의 독립 연설 2 · 8독립운동이 도쿄유학생들에게 큰 울림을 던 진 가운데 1919년 11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 던 여운형이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이 계획은 상해에 거주하던 일본인 목사 후지타 규 코(藤田九皐)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여운형은 임 정 요인들의 우려와 만류를 뿌리치고 고심 끝에 2 · 8 독립운동의 주역인 최근우, 또 와세다대학을 졸업하 현재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