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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안창호는 1908년 평양 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 다. 대성학교의 교육 목 표는 네 가지였다. 첫째 건전한 인격 함양, 둘째 애국정신이 강한 민족 운동가 양성, 셋째 국민 으로서 실력을 갖춘 인 재 육성, 넷째 강인한 체 력 단련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언어, 지리 교육뿐 아니라 실업, 체육 교육에도 중점을 두었다. 이같은 교육구국운동은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주에서는 서전서숙, 명동학교, 동창학교, 영신학교 등이 세워졌고 연해주에서는 소성학교, 계동학교, 한민학교 등이, 미주에는 한인중앙학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 국민군단 등이 설립되었다. 교육뿐 아니라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만 세보 등을통한 언론운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1898년 장지 연·박은식·남궁억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은 반일 논설을 여러 차례 실으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의 ‘시일 야방성대곡’ 논설을 실었다. 양기탁과 영국 언론인 베델이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 보는 대부분의 기자가 신민회 회원으로 의병 항쟁을 비롯 한 항일 운동 소식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사장이 영 국인이어서 다른 신문보다는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일제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글을 자주 실을 수 있었다. 일제에 잠식당하는 우리 경제를 구하자 | 경제적 구국 운동 일제는 경제 수탈을 통하여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다양한 구국 운동을 벌 1906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발의로 창간된 만세보. 만세보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과 계몽 운동을 이끌었으며 1907년 이인직이 시설을 인수하여 대한신문으로 제 호를 바꾸었다. 안창호 선생(왼쪽)과 그가 1908년,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의 1912년 제1회 졸업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