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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한글학자이자 민족운동가인 이극로 박사는 1893년 8월 28일 이곳 두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었다. 전의이씨 전서공파 28세로 아버지 근주와 어머니 성산이씨의 8남매 중 막내였으며 호는 고루, 물불, 동정 등으로 불렸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 후 1919년 서간도로 가서 대종교에 입교하여 윤세복,박은식,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동창학교와 백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립군으로도 할동했다 . 1916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 들을 도우며 동제대학을 졸업했다. 1982년 베들린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 철학, 언어학 등을 공부하며, 동방어학부에 조선어과를 설치하고 유럽에서 최초로 한글 활자로 '허생전'을 인쇄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인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1927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중국의 생사공업' 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대학 정치경제학부와 파리대학 음성학부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29년 귀국 후, 일제는 곧 우리말과 글을 말살한 것이라며 "언어가 망하면 민족이 망한다"는 신념으로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조선어학회 대표로 일제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한글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하였으며 국어 교과서 편찬과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도록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아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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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에서는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앞장했으며 1948년 평양에서 열린 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기념식 회의에 건민회 대표로 참석 했다가 북한에 체류했다. 북한에서 무임소 장관과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북한의 문화의 운동을 주도했다. 1978년 9월 13일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평양 애국열사동에 안장되었다. 1929년 12월,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김공순 여사와 결혼하여 수하에 억제, 대세, 한세, 세영, 세덕 3남 3녀를 두었다. 저서로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조선의 독립투쟁', '고투40년',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조선어 연구', '조선어소사전',' 조선어 조 연구' 등이 있다. 이극로 박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말은 민족의 정산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신념으로 우리말고 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으며, 광복후에는 민족 분단을 막고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민족이 비록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 같은 언어를 쓰며 한민족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데는 고루 이극로 박사의 공이 실로 지대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