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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김구 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과도정부와 독립정부 수립 을 주관하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좌우 통합 혹인 연립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김구 등 한독당 을 중심으로 한 임정 요인들은 좌익에 몸담고 있던 인사들에게는 편지 한통 보내지 않았다. 이들은 오 직 자신들과 비슷한 노선 즉 친미반공을 기치로 내 건 보수 · 우익 인사들에게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이 한독당과 이들이 이끄는 임정의 한계였다. 편협하고 완고한 임정 요인들 김구는 늦어도 1945년 11월 10일까지는 한국 출 발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김구 일행의 귀 국은 3주일을 더 기다려만 했다.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미 태평양사령관 주한미군사령부가 요구 사 항 때문이었다. 국무부의 권고를 받아들인 중국주둔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ebert C. Wedemeyer) 장 군은 임정 요인들에게 개인자격으로 한국에 돌아간 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국 에 필요한 교통편을 제공할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 았다. 이에 임정 요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서 명을 해야만 했다. “임정 요인들은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귀국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귀 국한 뒤에 정부로서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 다.” 서약서의 내용을 보면 이승만 등 재미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국무부에 제출한 출국신청서에 첨부된 것과 내용이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임정 요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를 가볍게 받아들 이지 않았다. 결국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서명하느냐 안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이를 보면 해방 뒤 두 달이 넘는 시점에서 하루라도 빨리 단기필마 (單騎匹馬)로 귀국을 서두르기 보다는 명분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C-47 수송기에서 울린 애국가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11월 19일 서약서에 서명 을 했다. 이를 중국주둔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한국독립 관련 유엔총회  결의안’(1947년)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1945.9.9)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조선 진주 를 알리는 전단(이상 대한민국역사 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