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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4년 12월 Special Theme  정의부 창립 100주년 기념 특집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공’ 바였다. 서간도의 ‘삼두마차’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 하기 위해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 군경 및 친일파 처 단, 일제 침략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는 주로 서간도와 인접한 평안북도에 집중되었는데, 경상북도까지 이르러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는 경 우도 있었다. 1920년 초 광한단·광복군총영(또는 광복군사령 부) 등 새로운 통합 단체가 성립되어 3개 단체의 ‘바 통’을 이어받았다. 광한단은 한족회·대한독립단·대 한청년단연합회 등 3개 단체의 통합체이다. 이 단체 는 평북 선천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고 1만원의 군 자금을 징수하는 등 국내에서 일제 침략기관 파괴 및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했다. 광복군총영도 서 간도지역 독립운동이 통합한 결실이다. 대한청년단 연합회를 주축으로 대한독립단 내 임시정부를 지지 한 인사들이 참여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였다. 그 리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그 휘하의 독립군단으 로 활약하였다. 이 단체도 국내로 단원들을 파견하 여 ‘적의 통치기관인 건축물 파괴, 일제의 고관대작 및 밀정 암살’ 등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경신참변 이후 근거지 재건을 위한 군사적 연대 1920년 말 만주지역 독립운동은 ‘경신참변(庚申慘 變, 일명 간도참변)’이라는 일제의 대규모 탄압과 민 간인 학살로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서간도는 이 에 앞서 ‘중·일합동수색’이라는 중·일 양국의 탄압까 지 받은 상태여서 이중고에 시달렸다. 서간도에서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자행한 대규모 탄압과 학살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되어 그 해 12월까지 약 3개 월 동안 지속되었지만, 같은 해 5월부터 8월까지 중· 일합동수색도 고려하면 실제 탄압은 반년 동안 지속 되었던 것이다. 서간도의 독립군은 서간도 및 국내의 산간오지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면서 일제의 만행 을 고통스럽게 견뎌내야 했다. 이러한 시련은 서간 도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독립단과 광한단·광복군총영의 연대가 특히 주 목할 만하다. 대한독립단은 단장 대리였던 이웅해뿐 만 아니라 도총재 박장호까지 압록강 건너편의 관전 현(寬甸縣)에 머물면서 근거지를 재건하는 데 힘썼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 초기 모습(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신흥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백서농장의 영농모습(이상 독립기 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