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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노력이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는 1885년 을유감계(乙酉勘界)와 1887년 정해감계(丁亥勘界) 두 차례의 영토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현지 답사를 통해 토문이 송화강과 흑룡강으로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 조선정부는 토문 =두만이라는 청나라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다만 함 북 무산부터 백두산까지의 경계를 두고 홍토수(紅土 水)와 석을수(石乙水)에 대해 양국이 맞서 합의문 작 성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청나라의 주장에는 만주족 의 장백산 기원론이 배경에 있었다. 이후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성립, 의화단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 속에 청나라가 약화되고 우리 의 영토의식이 강화되었다. 대한제국은 백두산 정계 비를 근거로 서북간도에 관리사 파견, 대한제국 진 위대의 청국 단련(團練)과의 무력충돌 불사, 변계경 무서 설치를 통한 간도 주민 보호, 현지 한인 사포대 (私砲隊) 조직과 무기공급 등 적극적인 간도정책을 펼쳤다. 함경도 지식인 김노규의 『북여요선(北輿要選)』, 장 지연의 『대한강역고』에서도 정부정책 흐름에 힘을 실었고, 1907년에 나온 「대한전도(大韓全圖)」에는 간도를 함경북도의 일부로 그리기도 하였다. 또 『황 성신문』을 비롯한 언론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지역 변경의 역사를 연재하여 러일전쟁 직전 한국의 위기 가 북방, 만주, 중국에서 왔음을 역사적 실례를 들어 환기하였다. 간도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주장하 면서도, 그것이 지닌 경제적, 국제적 가치에도 주목 하거나, 간도영유권을 대한제국의 식민지 개척이라 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도를 매개로 한 근대 영토민족주의가 최대한 발흥한 셈이었다. 독립운동 기지가 된 간도 그러나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간도문제에 일본 이 개입하면서 ‘간도문제’는 일본의 만주침략의 수 단 혹은 계기가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알명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 이곳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그 동안 대 한제국의 간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수용하여 청국과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문제 해결 수단으로 간도문제를 처리한다는 입장으로 전 환하고 1909년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주 요 내용은 영토문제에서 청국의 요구대로 하고, 주 「간도지나 및 조선인호칭사명약도(間島支那及朝鮮人呼稱社名畧 圖)」, 1917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두만강 대안지역 한인 거주 지역의 행정구역이 촘촘하다. 두만강(도문강)과 해란하, 포이합통하, 알아하 물줄기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