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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진은 1940년 결국 3당의 합당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40년 9월 17일 열린 한국광복군성립전례식에는 내무장으로서 정부 대표 훈사(訓辭)를 하기도 했다.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에서는 그를 의장으로 선 출했다. 임시의정원 개원 이래 세번째 의장으로 선 출된 것이다. 그는 광복을 맞아 국내로 돌아오기까 지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마침 임시의정원에는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김원봉 계열의 조선민족혁 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한 것이다. 홍진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헌법의 개정을 추 진하였다. 좌익 진영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 면서 약헌수개위원회를 만들고, 헌법 개정을 추진하 여 1944년 제7차 개헌이 성립되었다. 헌법이 개정되 면서 김원봉, 신익희 등의 인사가 임시정부에 참여 하는 좌우 연합정부가 구성되었다.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정원 회의 개회 일이자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었다. 홍진은 개회사 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우리는 앞에 남은 시간을 ‘행동’, ‘희생’의 길 로 나가는 것이 오늘 의회 개원식에 의의가 있다 고 봅니다. 즉 금후부터 원(院, 임시의정원)과 부 (府, 임시)가 독립운동 좀 해보자입니다.” (국회도서관 편, 『대한민국임시의정원문서』, 1974) 홍진은 좌와 우 가릴 것 없이 모든 세력이 통일을 이루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결국 독립을 위해 해야 할 것은 좌우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 이 그 전제조건임을 밝 혔다. 늘 그러했듯이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희생’과 ‘통합’을 강조한 것이다. 1943년 5월 10일 충칭에서 열린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총주석 자 격으로 연설중인 홍진(출처 대만중앙통신사). 태극기와 ‘대한민국 독립만세’라고 써붙인 구호가 매우 인상적이다. 8 · 15해방 직후 귀국 전 홍진이 쓴 글씨 ‘여자동귀(與子同歸, 모두 [국민, 가족들과] 함께 돌아가리라)’.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