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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주선교진료소의 후신인 광주제중 원(濟衆院)의 ‘사무인’으로 재직하며 1912년 나환자(癩患者)교회인 봉선 리교회의 설립에 참여했다. 같은해 북문안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14 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1919년 3 · 1운동이었다. 당시 전도사 였던 그는 3월 2일 서울로 올라와 김 범수 등과 광주에서의 만세시위에 대 해 협의했으며, 3월 5일 남대문 역전 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 신조선신 문 」 이란 유인물을 군중에게 나누어주 며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했다. 이어 대한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역 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조선독립’이 라 쓰여진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주 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보안 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앞으로도 독립운동 을 계속하겠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대해 “나는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있 으며, 어쨌든 나로부터 독립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히 대답할 정도로 굳은 민족의식을 갖 고 있었다. 각종 사회운동에 투신하며 좌·우의 계열을 중재하다 1920년 6월 서대문감옥(서대문형 1919년 서울 3 · 1운동 직후 최흥종 신문조서 최흥종 서대문감옥 수감자 카드(1920년, 이상은 오방 최흥종기념관 제공) 3 · 1운동 관련 최흥종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