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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3년 9월 Special Theme  관동대지진 100주년 특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리고 조선총독부는 사망 832명이라고 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개인적 정치고문으로 활동한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도 사이토 총독에게 300명 이하라고 보고했다. 도쿄의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실태 일본 관동지역에서의 일부 선행과 좋은 사례를 통 해 조선인학살이 아닌, 보호의 경우를 말하기에는 1923년 죽은 조선인이 너무 많다. 도쿄의 지진 피해는 동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도쿄 시와 인접한 5개 군에서 대화재로 인해 35㎞²가 소 실되었다. 최종적으로 진화된 것은 9월 3일 오전이 었으며, 도쿄 내 사망자, 행방불명자 7만여 명의 대 부분이 이 지역의 희생자였다. 도쿄도(東京都) 위령 당이 있는 도립 스미다구(墨田 区 ) 요코아미쵸 공원 ( 横 網町公園)에서는 약 4만 명이 희생되었다. 조선인학살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유언비어 이다. 도쿄 내 유언비어는 9월 1일 저녁부터 발생하 였다. 그 내용은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공 격해 온다” 등의 ‘조선인 폭동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 다. 유언비어의 확대와 조선인학살이 가장 극심 한 시기는 2일부터 5일 에 걸쳐서였다. 피해지역 및 그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료를 통해 살펴 보면 지역주민을 비롯해 피난민 등이 학살에 가담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쿄는 조선인 지식 인 · 학생층 또한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경우 하숙 이나 직업 관계로 일본인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은 은닉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는 동부 의 공장 지대 주변이나 각지의 공장 현장에서 동포 들끼리 뭉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지리나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인 노동자가 희생의 중 심이 되었다. 도쿄에서의 조선인 희생자 수는 ‘재동경(在東京) 이재(罹災)조선동포위문반’조사(1,781명), ‘요시노 사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경찰과 자경단이 저지른 조선인 학살(독립기 념관 제공) 일본 유학생 이주천의 관동대지진 목격담을 실은 조선일보(1923년 9월 8일). 이주천은 시나가 와에서 조선인 300명이 살해됐다는 호외를 봤다고 증언했다(조선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