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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1910년대 중반 이후 도일(渡日) 조선 인이 늘어나자 일본 당국은 조선인 통 제정책의 틀을 갖추어나갔다. 이후 단 기 유학생과 정주 노동자 구분 없이 재 일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촘촘 하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조선인 감시 의 중심 기관은 경찰과 친일 관변단체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본의 패망 을 확신한 재일조선인들은 교토(京都) 나 홋카이도(北海道), 나고야(名古屋)  등지에서 다양한 비밀결사를 결성해  각 노무자 합숙소를 순회하며 조국재 건을 협의했다. 그렇게 재일조선인들 은 엄혹한 총동원체제기에도 포기하 지 않고 해방의 여명을 만들어갔다. 재일조선인, 감시를 넘어선 통제 1910년 강제병합 직후부터 재일조선인은 일본 당국의 감시와 통 제의 대상이었다. 일본 당국의 감시와 통제는 조선인 도일(渡日) 역사 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11년 내무성 경찰청이 만든 문서인 「 내지재 주 조선인 청부현별 호수급 인원조(內地在住朝鮮人廳府縣別戶數及人員 調) 」 는 호를 구성해 거주하는 조선인의 거주 인원수를 파악한 자료이 다. 이미 이 때부터 일본의 경찰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재일조선인은 경찰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일제 말 기 재일조선인의 창씨개명 수속을 담당하는 창구는 시역소(市役所, 시 청)나 구역소(區役所, 구청)가 아닌 경찰서였다. 1911년에 시작된 감시의 역사는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1910년대 중 반 이후 조선인이 늘어나자 일제는 재일조선인 통제정책의 틀을 갖추 어나갔다. 단기 유학생과 정주 노동자 구분 없이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촘촘하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조선인을 감시하는 중심 기관은 경찰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경찰 외에 관변 친일단체인 상애회 (相愛會)를 통해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자 좀 더 강력한 조선인 통제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4년 오사카 에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를 필두로 각지에 내선협화회를 두었다. 내 선협화회는 경찰이 관리했는데, 동포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 교풍회 (矯風會)로 대체했다. 교풍회도 경찰서가 관리했다. 그러다가 1931년 관동군이 만주침략을 단행하면서 아시아태평양전 쟁을 시작하자 전시 상황에서 재일조선인 통제정책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산물은 1936년에 오사카(大阪)에서 발족하기 시작해 1938 년에 중앙기구가 된 재단법인 중앙협화회이다. 중앙부터 지방 지회까 지 모두 경찰서의 특별고등경찰과(일명 특고과)와 내선계(內鮮界)가 담 당했다. 중앙협화회는 당시 ‘여권’과 같은 기능을 가진 ‘협화회 수첩’을 통해 취업과 이동을 통제했다. 이 수첩이 없으면 직장을 구할 수도, 배급을 탈 수도 없었다. 통제체제는 1944년 11월 중앙협화회가 중앙흥생회로 바뀌었지만, 재일조선인의 통제기구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