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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3년 6월 Special Theme ‘의병의 날’ 13주년 기념 특집 한말 의병전쟁을 다시 본다 홍주성 전투 이후 의병재기 계획은 비록 실패했지만, 후기 홍주의병 전 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홍주성 전투 에서 패한 민종식은 이후에도 의병 재기를 도모했다. 이후의 의병운동에 민종식의 영향력은 여전히 컸다. 이 는 정산 · 서천 · 부여 · 당진 · 해미 · 태안 등지에서 1909년에 이르기까지 홍 주를 중심으로 이 지역 전체를 망라 하여 계속된 후기 홍주의병의 지도층 역시 민종식 부하들을 중심으로 이루 어졌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조선은 주자학의 질서 위에 세워졌고, 조선 말이 되면 서세동점의 물결 위에 외세로부터 주자학적 질서와 조선을 지키기 위한 의병운 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과 이 해 말의 단발령 을 계기로 각지에서 양반 유생층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의병운동의 사상적 배경은 주자학 이외의 것을 부정하는 위정척사론 에 있었다. 특히 홍주의병의 경우는 김복한, 이설 등 남당(南塘) 한원진 (1682~1751)을 종장으로 하는 남당학파 계열의 유학자들과 더불어 화 서학파의 연원을 갖는 곽한일, 유준근 등의 유학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는 특징을 보여준다. 홍주의병이라고 할 때 ‘홍주’는 20세기 이전에는 홍주부(洪州府)라고 하여 광의의 지역 개념으로 충남 서북부 지역을 의미한다. 전기 홍주의병의 봉기 홍주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 1895년 5월(음력)부터 의병운 동을 일으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홍주 지역의 유생들인 안창 식, 박창로, 채광묵, 이세영 등은 6월(음력) 청양에서 봉기하기로 하였 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지만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봉기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을미사변(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직후 박창로, 이세영, 채광묵, 송 병직, 정제기 등은 9월부터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는 등 의병 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단발령(음력 1895 년 11월 15일)이 실시되자, 홍주지역 관리 출신의 유학자들인 김복한, 이설 역시 홍주지역 유생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당시 갑오변란을 계 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있던 학식과 명망이 있는 김복한과 이설 을 통하여 의병운동의 지도적 인물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1895년 11월 28일(양력) 안창식은 청양 유생 채광묵 등과 함 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하고,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였다. 다음 날 안창식의 아들 안병찬과 채광묵이 의병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들어갔 다. 12월 1일에는 이봉학, 이세영, 김정하 등 대흥, 부여, 정산, 청양, 홍 산 지역의 많은 의사들이 수백 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