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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29 연설회, 토론회,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교육과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였을 때는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는 신문물 도입을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 갔던 안창호가 귀국하여 만든 단체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인 양기 탁이 신민회 창립에 앞장섰으며, 역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인 신채 호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애국 계몽 활동을 이끄는 단체들이 대 거 일제의 탄압을 받자 신민회는 비밀리에 조직 활동에 나섰으며, 언론인, 종교인, 교사 및 학생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실력 양성을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과서 및 각종 서 적 출판을 위하여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만들었다. 또한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하여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대한매일 신보를 통하여 언론 활동에도 앞장섰다. 뿐만아니라 무장 독립 투 쟁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주 유하현 삼원포 독립항쟁기지를 계획하는 한편, 국어·국사 연구를 통하여 애국심 고취에도 적극 나섰다. 1909년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를 중심으로 한 신민회 소속 청년들은 국권 회복운동을 목적으로 독립항쟁단체인 대동청년단 을 조직하였다. 애국 계몽 단체들이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하여 중점을 둔 것은 교육과 인재 양성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재를 개발하여 청년을 계몽하는 데 주력하였다. 1909년까지 보성학교, 양정학교, 오산학 교 , 대성학교 등 전국적으로 5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서당을 개조한 소규모 형태부터 규모 가 제법 큰 근대식 학교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였다. 신민회 회원인 이승훈은 원 래 유기행상에서 출발한 사업 가이다. 유기공장과 무역으로 큰 돈을 번 뒤 신민회 경제사업 의 일환으로 출판사와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고, 1907년 평안 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워 신 학문과 애국사상을 높였다. 신민회 회원인 이승훈 선생(왼쪽)이 민족 교육을 위해 1907년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 대한매일신보 (제3권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