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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97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는 1908년 7월 초부터 9월에 걸쳐 함경도 국경 지대로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수적인 열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운동은 1908년 가을 이후 퇴조기로 들어가게 된다. 선생 역시 표면상으로는 의병운동과 일 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선생은 1909년 1월 31일 고본주 총회에서 1908년 11월에 창간된 대동 공보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1910년 12월 선생은 이종호와 함께 연추에 비밀로 조직된 국민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고, 자신의 주택을 본부 사무실로 제공하여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지원했다. 최재형 선생을 제거하기 위한 일제의 끊임없는 음모 1911년 초 일제는 최재형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 일제의 첩자라는 날조된 문서를 만든다. 러시아 당국의 조사를 받았지만 헌병대장과 경찰서장 등 이 그가 애국자라는 것을 증언해 석방될 수 있었 다. 당시 일제는 추방될 선생을 태워갈 배를 블라 디보스토크에 대기시켰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밀접한 동맹국 관계로 발전한다. 일본외무상 모 토노 타로는 러시아 정부에게 한인 지도자들을 일본당국에 넘겨주거나 시베리아 오지로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선생은 러시아당국에 체포되는 수난 을 당한다. 다행히 선생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첫째 사위 김야곱 안드레 예치의 주선으로 석방됐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러시아혁명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 스크 , 하바로브스크, 스파스크. 포셋트 등지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습격한다. 4월 참변으로 불리고 있는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고 고문당했다. 4월 4일 부인과 딸들은 일본군의 보복을 걱정하며 선생에게 도피하라고 권했다. 최재형 선생은 자 기가 숨으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다칠까 염려해 거절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잡 혀 김이직, 엄주필, 황카피톤 등 3명의 인사과 함께 재판 없이 총살됐다. 최재형 선생이 운영한 대동공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 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