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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사상적 기반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에 참가했다. 제2회 회의 때는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 됐고 제5회 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됐다. 1919년 9월 이승만 박사가 임 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가 미국에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일로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 임시정부 노선을 취했다. 언론활동과 동시에 무장 투쟁의 길로 1919년 10월 상해에서 ‘신대한지’를 발행해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 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1920년 4월 북경에서 제2회보합단을 조직했다. 1920년 9월에는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해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 휘계통과 독립항쟁노선의 무장투쟁 노선의 통일을 추구했다. 1923년 1년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항쟁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한 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을 썼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 요인 제거와 기관 을 파괴한 의열단원들이 휴대하는 필수품 중 하나였으며, 국내, 중국, 일 본 등 각지에 널리 뿌려졌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창조파에 가 담하여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해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열 중했다. 신채호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항쟁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해 활동했 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 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 의 결의에 따라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잡혀 10년 형을 받았다. 신채호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1936년 2월 21일 순국했다. 신채호 선생의 옥중 모습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생가 근처에 세워진 신채호 선생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