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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91 선생에게 내각 구성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안창호 선생은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해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시작했다. 다시 미국으로 간 안창호 선생은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고 멕 시코와 쿠바, 필리핀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전세계 한인네트워크 구축이 어렵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선생은 외교활동과 독립전쟁 준 비를 위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떠났고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 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독립세력 통합으로 기반을 쌓다 당시는 임시정부가 3곳이 있었으며 독립군 조직들 도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안창호 선생은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하고 통일된 독립항쟁을 수행 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조건들이 다른 다양한 독립항쟁세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세력의 수평적 연대인 대독립당 건설과 독립항 쟁의 기지이자 정신적 문화적 구심점이 될 이상촌 건 설을 추진해갔다. 극우·극좌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던 그였지만 1927년 만주 각지를 돌며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불굴 의 의지로 결국 상해·광동·무한·남경 등지에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됐다. 안창호 선생은 민족 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교육평등을 제시하고 민족 간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 일주의를 주창하여 좌·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민단장이라 오인 받아 국내로 잡혀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일제가 조작한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 오랜 감옥생활로 결국 결 핵을 얻어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 의 일기로 서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2001년 8월 11일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 건립한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