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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받았고 이후 가는 곳 마다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줬다.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점진학교와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도활 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껴 본격적인 교육학을 배우고자 미국 유학을 결 심했다. 한인 사회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를 시작한 안창호 선생이 본 것은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는 동포들이었다. 타국에 서 천시받지 않고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한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 를 만들었다. 1904년에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안창호 선생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해 그 지역 한인들의 믿음을 얻어 한인공동체의 지도자 가 됐다.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모두와 공유하자 지역의 미국인들로부터도 신용을 얻었고 교 민들은 리버사이드 한인공동체를 ‘도산의 공화국’이라 불렀다. 한인사회가 자리 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안창호 선생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공립협회를 창립 했다. 하지만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이 재외동포를 보호하지 못하고, 양반집권층이 국권을 지킬 의지도 없자 국민을 새롭게 하여 국민의 힘으로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했다.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 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세계 한인네트워크로 일본정부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귀국한 안창호 선생은 서북학회 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하고 가옥 개량,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 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해갔다. 하지만 일제는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식민통치를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 191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안창호 선생 공립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