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page

Special Theme •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결행된 도쿄 2 · 8학생독립운동 29 2 · 8독립운동 당일의 시위는 행사 도 중 일본 경찰에 제지당하고 주도세력 이 피체됨으로써 미수에 그친 모양새 가 되었다. 그러나 2 · 8독립운동은 그  날의 사건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당 장 구속을 면한 학생들은 2월 12일  히비야공원에서 제2차 시위운동을  결행하여, 변희용 · 최재우 · 강종섭 · 최 승만 · 장인환이 구속되는 사태도 일 어났다. 유학생들은 대거 일본을 떠 나 조선으로 귀국했다. 망국의 공간  속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던 1919년 의 이른 봄, 도쿄의 유학생들은 ‘독립  한국’을 갈망하며 ‘적국의 땅’에서 독 립운동의 개척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세계인들이 인간의 양 심에 따라 정의와 인도주의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 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 가능성 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그들은 뜨거 웠다. ‘독립 한국’을 염원하고 행동한  그 열정과 용기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서 길이 기억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3 · 1운동을 이야기할 때 1919년 2월 8일 도쿄[東京] 조선기독 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일본 유학생들의 2 · 8독립운동이 3 · 1운동의 기 폭제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정작 2 · 8독립운동 자체의 의 미를 되새기는 데에는 다소 인색한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당시 2 · 8독립운동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취하여 안이한 이상론에 경도되었다거나, 혹은 2 · 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나, 열혈 청년이었던 서춘(徐椿)이 나중에 친일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이 ‘있 는 그대로의 2 · 8운동 바라보기’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2 · 8독립운동 이후 주역들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 2 · 8독립 운동이 얼마나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그들 이 이러한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결행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선언서에서 천명한 정신은 무엇이었는지를 따라가 보자.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신청년(新靑年)’ 도쿄 유학생들 몽양 여운형은 “3 · 1운동 전후의 저 낭만적 계몽기에 있어서…동경 재류 조선학생 대중은 실로 후세사에 남길만한 공적과 역할을 수행한 것이며, 조선 지식계급의 모든 진보적 운동을 위하여 동경 유학생계 는 확실히 온상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몽양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1910년대 도쿄에 있던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한국 근대 엘리트의 총집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모임터는 간다구[神田區] 고니시카와초[西小川町] 2정목(丁目) 5번지 호리도메바 시[掘留橋] 근처에 위치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이 곳은 스코틀 랜드 기독교청년회와 미국 뉴욕세계기독교청년회의 성금과 유학생의 의연금을 보태서 미국인 건축가 W.M. 보리스(Vories)가 한국YMCA의 의뢰를 받고 설계하여 1914년에 완공되었다. 130평의 부지에 총건평 74평의 서양풍 2층 목조 양옥 건물인데, 이채롭게도 출입구에는 기와 지붕을 올려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냈다. 당시 도쿄조 선기독교청년회의 간사였던 백남훈은 이 건물이 완공되자 유학생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곳은 금방 유학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재도쿄조선기독교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