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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대 초반 서간도지역 독립운동 단체와 대한통의부의 국내 진공 29 1922년 8월 초까지 일련의 노력으 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는 새 로운 통합단체가 서간도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국내 진공은 사실상 한인 자치의 기 반을 다지는 활동이었다. 독립운동 의 근간이었던 한인사회는 때때로  월강하는 일본 군경의 위협을 받았 다. 이에 의용군은 동포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 진공을 전개했 던 것이다.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내  한인들의 실업 장려와 교육에도 힘 썼다. 노동강습소 개설, 공장 설치,  공동경작제 실시 등 실업 장려에 힘 쓰는 동시에, 광동학교 설립 및 모범 고등학교 설립 추진 등 한인 교육에  노력하였다. 대한통의부의 실업 장 려 노력은 만주농업공사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만주농업공사는 후 일 정의부의 유한농업공사로 계승되 었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수립되었고, 남만주 서간도(西間島) 각지에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성 립되었다. 이에 서간도의 한인들은 머지않아 독립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국내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이 일본 군경의 잔혹한 탄압을 겪고 무장투쟁으로 운동방략을 전환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발전한 청년들은 하루라도 빨리 조국 땅으로 들어 가 일본 군경과 매국노를 처단하기를 고대하였다. 3·1운동 이후 삼두마차의 등장과 독립전쟁에 대한 기대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일대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는 그 실 체가 확인되는 것만 해도 24개가 된다. 이 가운데 서간도지역 독립운 동의 ‘삼두마차’ 역할을 한 단체는 한족회(韓族會, 훗날 서로군정서)·대 한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이다. 각각의 단체는 신민회 계열, 의병 계 열, 청년층의 주도로 성립된 것이다. 3개 단체는 1920년대 초반 서간 도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한족회는 서간도 내 한인을 대변하는 자치기관으로 성립되었다. 한 인 자치 실현을 지향한 부민단·자신계·교육회 등의 전통을 계승하여 “남만주 이주동포의 자치기관”을 자부하였다. 이에 비해 대한독립단은 독립전쟁을 곧바로 착수하기 위해 지단(支團)을 설치하여 활동하는 한 편, 러시아 연해주에 청년들을 보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를 토대 로 대한독립단은 유격전이라는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 한청년단연합회는 대한독립청년단에서 발전한 단체이다. 대한독립청 년단은 『반도청년보』·『청년혈』 등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활 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이는 대한청년단연합회로 발전한 뒤에도 이 어져 『대한청년보』의 발행으로 계속되었다. 서간도의 ‘삼두마차’는 그 성립 주체가 다른 만큼이나 활동 양상도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국내 진공’은 3개 단체의 활동 양상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 다. ‘국내 진공’은 1919년 당시 서간도의 독립운동계에 부여된 막중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전쟁’에 대한 기대가 무 르익었다. 이는 해외 독립운동자뿐만 아니라 동포 대부분이 기대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