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page
Special Theme • 학생, 3·1운동으로 역사에 등장하다 29 끝나고는 학교로 돌아온 중등학교 학 생들도 맹휴투쟁을 전개했다.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도 맹휴가 이어졌다. 이제 학생들은 맹휴라는 직접행동을 통해 민족문제는 물론 학교문제에 대 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는 데 주저 함이 없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10월 22일 3학년 학생들이 수공과 농 업 과목의 폐지를 요구하며 맹휴를 벌 였다. 11월 3일에는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天長 節) 행사에 대한 거부 표시로 곳곳에서 맹휴가 일어났다. 일본어 대신 영어를, 일본사 대신 한국사를 가르쳐 달라며 맹휴가 일어나기도 했다. 거리의 3·1 운동은 끝이 났지만, 학교 울타리 안에 서의 3·1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 다. 이때부터 맹휴는 학생운동이 학교와 사회에 대 한 문제제기를 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식으로 자리잡 아갔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시위가 세 달간 전 국으로 확산된 데는 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 . 이 렇게 3·1운동에서 보여준 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열 정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로 재 직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2015),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2017), 『모두의 민주주의』(2025년 2월 예정 ) 의 3부작을 발간했거나 준비중이다. 또한 한국 현대 대학사를 대학권력 · 국가권력 · 시장권력의 차원에서 분석한 『대학과 권력』(2018)을 출간했다. 필자 김정인 3·1운동의 현장인 태화빌딩 1층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 독립선언 기록화’(한겨레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