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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위해 미국과 외교를 시도하다 29 러 차례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친한파 미국인 관료 들 중에서도 임시정부와의 군사합작에 반대하는 의 견들이 있었다. 단체가 아닌 개별적으로 한국인들을 선별해 훈련시켜야 한다는 국무부와 군부의 압도적 인 주장도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 측은 OSS와의 협력에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임시정부는 미국과 OSS에 호 의적이며 OSS의 작전을 환영한다는 태도를 선명하 게 보여주었다. 김구는 에이플러 대위에게 “현재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천천히 건설할 수 있는 완전 한 협력”을 제의했다. 1944년 7월, 굿펠로우는 도노 반에게 “한국인들은 OSS에 의해 훈련을 받을 수 있 고, 그들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비행기 또는 잠수 함으로부터 한반도에 착륙할 수 있다. 한국은 OSS 팀에 큰 목표를 제공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1945년 3월 OSS 작전장교를 통해 “5개 전략지역에 서 정보를 수집 보고한다. 이들 첩보원들은 상황에 따라 육로 또는 공중 및 해로로 서부 한국에 이동할 것” 등의 구체적인 계획, 이른바 “작전명, 독수리(독 수리작전, Eagle Project)”로 발전되었다. 독수리작전은 OSS가 주체적으로 수립한 계획 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에서 임시정부와의 합작 에 회의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OSS가 임시정부 에 대한 신뢰가 없었으면 수립이 더욱 어려웠을 것 이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작전은 OSS와의 신뢰감 형성이었다. 1945년 초, OSS는 싸전트 대위(Clyde B.Sargent)를 임시정부 측에 파견했다. 이때 임시 정부와 광복군 측은 싸전트와 친밀감을 형성하고 자 노력했다.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싸전트에게 기획된 작전들에 광복군이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싸전트는 그런 임시 정부 입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참 독수리 작전 준비 훈련이 진행 중이던 1945년 8월, 싸전트 가 OSS에 보낸 보고서에는 한국인들이 미국의 영 향력을 선호하며 광복군이 미국 군대와의 상호협 OSS 훈련 당시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과 OSS 윔스 대위 (1945, 독립기념관 제공) 한국광복군 제2지대 국내정진대원 장준하·김준엽·노능서(오른쪽부 터, 나남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