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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간도, 백두산 인식과 독립운동 29 오늘날 ‘간도(間島)’와 백두산에 대 한 인식은 민족주의와 민족적 정체 성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 그리고 자연지리적 맥락 등 오랜 연원을 지 닌 사안이고, 국제정치적 맥락도 지 니고 있다. 남북만주 일대가 한국독 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 이었고, 또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무 대였던 만큼 독립운동과 한국민족 주의 역사인식의 원형이 만들어졌 다. 민족의 기원과 변화, 상징에 대한 다양한 인식도 형성되었다. 19세기 부터 시작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 넌 이주의 역사, 민족주의 역사가들 의 단군 백두산 발상 및 북방중심의 역사관 구축, 그리고 서북간도에서 의 독립운동 기지 구축과 전개는 서 로 배경이 되고 영향을 주어 한국민 족주의와 한국독립운동의 의미와 성 격을 규정하였다. 곧 한국 독립운동 은 이주 한인, 간도문제, 백두산 문제 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저항성과 국 수성(國粹性)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간도의 명칭과 이른 바 ‘간도문제’, 간도영유권, 민족의 상징이 된 백두 산, 그리고 대종교로 상징되는 ‘단군 민족주의’와 1910년대 독립군 기지 북간도·서간도 등에 대해 간단히 살 펴보기로 한다. 간도의 명칭 ‘간도’라는 명칭은 간도(間島), 간도(墾島), 간토(墾土) 등에서 나왔다 는 것이 통설이다. 19세기 고종대 두만강 가운데에 있는 섬을 함경도 종성 인근 사람들이 개간하면서 간도(間島: 사잇섬)라 불렀고, 차츰 대 안(對岸) 지역까지 개간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간도(墾島)도 혼용되었다. 이것이 영토문제와 결합되면서 간도의 범위는 무산, 회령, 종성, 온성 대안과 현재 중국 연변(延邊)의 해란강(海蘭江) 이남 지역을 간도라고 통칭하였다. 간도라는 명칭에는 한인들의 두만강 대안지역으 로 이주와 개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북간도(北間島 · 北墾島)라는 명칭은 대한제국기에 등장하였다. 1902 년 간도지역에 이범윤(李範允)이 ‘함북간도시찰(咸北間島視察)’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줄여 ‘북간도시찰’이라 부 르면서 북간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함북간도’라는 말에는 함경북 도의 일부인 간도라는 뜻으로 강한 영토의식이 담겨 있었다. 한편, 조 선시대에 ‘강북(江北)’이라 불렀던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西間島)라 부르기 시작했다. 북간도의 대칭(對稱)이었다. 북간도와 서간도라는 호 칭은 함경도를 관북(關北), 평안도를 관서(關西)로 부르는 전통도 한 몫 하였다. 1907년에 설치된 통감부간도파출소는 현재의 중국 연길 지역 전체(당시 연길청)를 ‘동간도’라고 부르고, 길림 남부의 송화강 상류 일 대를 ‘서간도’로 지칭하였다. 이러한 지칭은 송화강 지역까지 간도의 범 위를 확대함으로써 일본의 만주침략 매개로 간도문제를 활용하려는 의 도에서 나왔다. 간도문제와 간도영유권 이른 바 ‘간도문제’는 고종 초기인 1869년, 1870년 함경도 지역에 대 기근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주로 함경도 출신)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너 이주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정부는 한동안 이들을 귀환 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다가, 백두산정계비의 ‘東爲土門西爲鴨綠(동위토 문서위압록)’ 구절을 환기하면서 자신들이 개간한 간도지방이 조선영 토임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서북경략사 어윤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