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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희생과 통합 지향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 홍진 29 유일당운동은 관내를 넘어 만주에서도 이루어졌 다. 홍진도 마침 만주(중국 동북지방)를 주목하고 있 었다. 1928년 1월 지린(吉林)에 도착한 그는 만주의 여러 단체와 인사들을 찾아 다니며 유일당의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1929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창 (五常)에서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기 반 안정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확보와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다. 1930년 7월 홍진은 지린성(吉林省) 웨이허(葦河) 에서 조직된 만주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당수)으 로 선출되었다. 만주 한국독립당은 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김좌진의 죽음을 기해 하나로 모이게 되면 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1931년 11월 당의 군대인 한국독립군을 만들고 중국 지방군과 연대하여 동경 성 · 대전자령(大甸子嶺) 등에서 일본군 등과 무장투 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3년 10월 한국독립군이 중국의용군인 길림구 국군에 무장해제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시정 부의 김구가 중국 관내로 이동할 것을 제의하였다. 홍진은 만주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함께 베이징을 거 쳐 11월 난징(南京)에 도착했다. 이 당시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난징 등으로 이동하고 있던 시기였다. 홍진의 대당체(大黨體) 건설을 위한 노력은 관내에 서도 계속되었다. 신익희의 한국혁명당과 연합하여 신한독립당을 만들었고, 김원봉이 주도했던 의열단 등과 함께 합당체인 민족혁명당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계와의 다툼 끝에 다시 탈당하 고 말았다. 민족 통합에 좌우는 중요하지 않다 홍진은 민 족혁명당 탈 당 후 조소앙 과 함께 재건 한 국 독 립 당 을 이끌었다. 그리고 지속 적으로 민족 주의 계열의 단결을 주장 했다. 1937 년 한국광복 운 동 단 체 연 합회(광복진 선)의 결성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1939년 치장(綦江)에서는 한국독립당과 한국국 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의 통일을 추진하기도 했 다. 잠시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홍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이 1933년 6월 7일 일본군 · 만주 국군과 전투를 벌였던 동경성전투 현장 추정지(현재 헤이룽장성 닝 안시[寧安市] 발해진 발해중학 부근, 독립기념관 제공) 홍진 국무령 취임 기사 「환영 국무령」(『독립 신문』1926.9.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