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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3 · 1운동의 태동과 서울 3 · 1운동의 전개 29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거리인 혼마치길(本町通, 현재 의 충무로)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마치 남 쪽의 남산 자락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 다. 시위대의 목표는 남산의 조선총독부였다. 위기 의식을 느낀 총독부 당국은 급히 조선군(일본의 조 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가 용산에서 혼마치 방면으로 출동했다. 일제 군경은 혼마치 2정목(현 충 무로 2가)에 방어선을 치고 기마대와 칼로 시위대를 위협하여 해산시켰다. 그리고 군경은 시위 주동자들 을 체포하여 이날 서울 시내에서 모두 134명을 체포 하였다. 3월 3일 고종 인산 때에는 시위가 없었으나, 5일 에는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준비한 대규모 시위가 일 어났다. 이날 아침 9시경 학생들 수천 명이 남대문역 앞에 모여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 대표 2명이 인력거 위에 올라타고 ‘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시위대는 남대문 방면으로 행 진했다. 경찰은 칼을 휘두르면서 학생들을 해산시키 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이날 시위에는 여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서울에서는 상인과 노동자들이 철시, 파업, 시위 등으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또 청년과 학생 들은 각종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으며, 특히 『조선 독립신문』은 팀을 바꾸어가면서 계속 발행되면서 학 생과 시민들을 고무시켰다. 경찰은 학생들이 많이 거 주하는 지역에서 가택수색을 전개하여 상당수의 학 생들을 유인물 제작 및 배포와 관련하여 체포했다. 서울에서 다시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22 일 노동자대회 이후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회 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노동자들이 많이 살던 남대문역 뒤쪽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것이 계 기가 되어 23일부터 서울의 시위는 다시 불붙었다. 23일 밤 훈련원 부근, 동대문 안팎, 동소문 부근, 돈 암리, 청량리, 왕십리, 마포, 양화진, 수색, 구파발 등 서울 시내와 외곽의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 서울의 시위는 24, 25, 26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 시위는 서울의 외곽에 있는 경기도 지역으 로 계속 확산되어 갔다. 26일 경기도 고양군 일산, 광 주군 송파, 파주군 파주, 용인군 금양장, 강화군 교동 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27일에는 수원군 송산, 장단 군 동장리, 시흥군 양재리, 파주군 교하면 등 각지에 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경기도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불붙기 시작했으며, 3월 말~4월 초 경기도의 각지로 퍼져나갔고, 수원군과 안성군은 전국적으로 3 · 1운동이 가장 드세게 일어난 지역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서울은 3 · 1운동의 발상지, 그리고 만세 운동의 진원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것이다. 필자 박찬승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목포대 · 충남대를 거쳐 한양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이다. 한국사연구회 회장, 한양 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1919: 대한민국의  첫번째 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 『혼돈의 지역사 회』,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