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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 공의 휘는 복수요 자는 경도요 청암은 호이다. 관은 영양이니, 당안염사 영의공의 자손이다. 임진란에 노모를 받들어 비로소 총송으로 오신 운강선생의 12세손이다. 아비지의 휘는 붕석이요, 어머니는 월성정씨이나, 서기 1880년 공이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에서 출생하시었다. 무술을 좋아하였다. 한말에 풍운이 급박하게 되자 항상 갱개불운함을 참지못허더니 고종 을사에 소위 보호조약이 성립되자 공이 25세의약관으로 분울을 견딜 수 없어 구국안민의 대의를 품고 기회를 엿보던중 이떄 동암 정환직선생이 고종황제의 밀소를 받들어 그 자제 단오공을 영남에 보내여 산남의진기치를 세우고 동지를 모집하자 공이 말하기를 장부가 죽을 곳이라 하고 맹단에 달려가서 전약을 세우고 격문을 각지로 날리니, 국내의열지사가 모여드는 자 천수백에 이르렀다. 대오를 정하고 병기를 정돈하여 위무당당 적을 향해 출격하여 청하에서 적병을 대파하고 각진을 연이어 돌격하니 산남의진이 향하는 곳에 적이 있을 수 없었다. 혹은 보급로를 끊고 혹은 기습작전으로 결사대를 출동할 때면 공이 반드시 선봉이 되니, 장졸들이 공의 지용에 감탄하지 않는 자 없었다. 흥해 영덕에서 파죽지세로 적들 무찔렀고, 군위에서는 적군소혈을 엄습하여 병기를 탈취하고 문서를 불사르고 적세를 위압하더니 마침내 입암과 동대전투에서 정환직장군 부자가 후선국하니 사기가 부진한지라, 공이 패진장졸을 규합하여 운왕산에서 밀모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대세가 기울어짐에 분울을 참지 못하고 지내다가 서기 1930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니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랴.
한분 자제와 한분 따님을 두었으니, 아들인 재직은 일경이 박해에 못이기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공이 서거하신지 46년인 서기 1975년 3월 1일에 향중사임들이 공을 추모하여 기념사업회를 발기하였더니 서기 1976년 12월에 자제인 재식이 귀국으로 유헙를 건립하는 것입니다.
서기1977년 4월 12일 산남의사 청엄남공 기념사업회